《새 학기가 되면 학교폭력에 관한 상담건수가 방학 때에 비해 2배 이상 증가한다. 더 심각한 점은 학교폭력에 시달리는 학생 중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경우가 절반을 넘는다는 사실이다. ‘청예단’(청소년폭력예방재단)이 최근 벌인 학교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조사대상인 전국 초등 5학년∼고교 2학년 4119명 중 30.6%가 ‘괜히 일이 커질 것 같아서’, 23.1%가 ‘소용없을 것 같아서’ 외부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빵셔틀’ 같은 신종 학교폭력에 시달리는 학생들은 ‘별일 아닌데 내가 너무 예민한 거야’라며 스스로를 합리화하거나 문제해결을 포기하기도 한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다보면 분노조절이 잘 되지 않거나 신경이 예민해진다. 극단적으로는 우울증이나 정신분열, 자살충동을 호소하기도 한다. 쉽게 드러나지 않는 학교폭력일수록 무섭다. 자녀의 ‘이상 징후’를 재빨리 발견하는 것이 핵심이다. 초기에 현명하게 대처하면 사건이 심화·확대되는 현상을 막을 수 있다. 신종 학교폭력에 1년 가까이 시달렸던 학생들과 그 학부모들의 사례를 통해 적절한 대처법을 알아보자.》
우울, 성적 하락, 전학 희망… ‘징후’ 보이면 학교 폭력 의심-대화를 ‘일 커질 것 같아, 소용 없을 것 같아’ 피해학생 상당수가 침묵
[사례] 갑자기 아이의 성적이 떨어진다면?
중학교 1학년 K 군은 상위권 성적에 모범적인 학생이었다. 초등학교 때까지 학급회장이나 부회장을 했을 정도로 교우관계도 좋았다. 전업주부인 어머니 L 씨는 외아들인 K 군이 초등학교 때부터 학교 어머니회의 임원으로 활동했다.
K 군에게 이상한 징후가 포착된 시점은 중학교에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다. K 군은 정기적으로 받는 용돈 외에 가끔 2만∼3만원씩 돈을 요구했다. 처음에 L 씨는 ‘친구들에게 한턱 쏘려나보다’라는 생각으로 흔쾌히 주었다. 몇 회 반복되자 L 씨는 “혹시 PC방에 가거나 친구들하고 노는데 돈을 쓰는 것이 아니냐”고 질책하며 돈을 주지 않았다. 얼마 후 L 씨의 아들이 L 씨의 지갑에 손을 댄 정황이 포착됐다. L 씨는 혹시나 아들에게 도벽이 생긴 것은 아닌지 염려가 되면서도 섣불리 물을 수 없어 지켜보았다.
1학기 중간고사 때 학급 2등이었던 K 군의 성적은 기말고사 때 9등까지 떨어졌다. 학원 강사는 “별다른 문제행동을 보이지는 않지만 다소 어둡고 무단결석을 할 때가 가끔 있다”고 말했다. L 씨는 아들에게 사춘기가 온 것 같다고 단정하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되자 K 군의 성적은 반 10등 밖으로 떨어졌다. 아들에게 뭔가 일이 생겼다고 직감한 L 씨는 학교폭력상담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L 씨는 아들이 자신의 지갑에 손을 댄 점, 아이 성적이 많이 떨어진 점을 이야기했다. 상담원은 다른 변화는 없었는지 물었다. 생각해보니 아들이 심하게 잠꼬대를 하거나 자다가 비명을 지를 때가 많았다. 상담원은 K 군이 학교폭력을 당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가정하고 L 씨에게 대화법을 코치했다. L 씨는 “혹시 학교에 무슨 일이 있느냐. 혹시 누가 괴롭히지는 않느냐. 절대 학교에 이야기하지 않고 아빠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엄마만 알고 있겠다”고 말하며 아들을 설득했다. 특히 “절대 보복당하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할 테니 안심하라”고 일렀다. K 군은 그제야 1학기 때부터 학급 ‘일진’ 학생에게 빵셔틀을 당해온 사실을 털어놨다.
L 씨는 아이에게 언제부터 어떤 방식으로 괴롭힘을 당했는지 물었다. 가해자가 어떤 학생인지 알게 됐고 그 부모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L 씨는 학교폭력 상담원의 조언대로 상대 부모나 학생에게 직접 연락을 하지 않았다. 일단 담임교사를 찾았다. 모든 사실을 이야기하고 “어떤 경우에도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말고 함께 사건을 해결하자”고 제안했다.
L 씨는 반 전체를 대상으로 학교폭력에 대한 설문조사를 하도록 교사에게 요청했다. 학생들에게는 비밀을 절대 보장할 것을 강조하고 반에서 일어나고 있는 빵셔틀, 괴롭힘, 상납 등의 학교폭력 사실을 상세히 적도록 지시했다. 철저한 비밀 보장을 위해 뒷자리 학생에게 설문지를 걷게 하지 않고 교사가 직접 했다. 이런 방식으로 피해자인 K 군 뿐 아니라 다른 학생들이 받은 피해사례를 적은 내용을 증거로 확보했다.
교사는 L 씨와 K 군, 가해학생과 그 부모를 불렀다. 재발방지를 위한 각서를 받고, 만일 보복을 할 때는 퇴학까지 징계를 받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K 군은 이후 빵셔틀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L 씨는 “아들이 당한 모욕감과 고통을 생각하면 가슴에 맺힌 덩어리를 어디에서도 풀 수 없을 것 같지만 문제를 해결하고 조금씩 밝아지는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된다”고 말했다.
[진단] 피해학생의 경우 부모의 관찰이 문제해결에 매우 중요하다. K 군도 학부모가 학교폭력의 징후를 비교적 빨리 포착한 편이다. 일반적으로 한 번 괴롭힘의 대상이 되면 1년 이상, 학년이 바뀌어도 지속되는 경우가 많다. 시간이 지날수록 피해학생의 심리적인 스트레스가 심해지고 학생들 사이에서 ‘저 아이는 모두에게 괴롭힘을 당해도 되는 아이’로 낙인찍히기 때문에 학부모가 빨리 사건에 개입할수록 좋다.
중고생 자녀의 이상 징후에 대해 사춘기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체크리스트(그래픽)의 항목처럼 아이가 △말을 잘 하지 않거나 △학교나 학원에 가기 싫어하고 △전학이나 자퇴에 관한 말을 꺼낸다면 한번쯤 학교폭력을 의심해보는 것이 좋다. 조정실 학교폭력피해자가족협의회 회장은 “은밀하게 일어나는 학교폭력이라고 해도 이상한 징후는 반드시 보인다”면서 “이를 잘 포착하고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상황은 충분히 바뀔 수 있다”고 말했다.
증거확보가 어려운 학교폭력일수록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중요한 것은 학부모, 교사 등 어른들의 초기 개입이다. 조 회장은 “아이들에게 반성문을 쓰게 하는 방식으로 책임을 묻고 끝내면 재발로 연결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단호하게 대처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학교에서 발생하는 상황인 만큼 교사가 주도권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사건해결에 나서야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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