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그들을 다시 꿈꾸게 한 ‘희망의 인문학’

  • 입력 2009년 8월 10일 02시 59분


4일 ‘서울시 희망의 인문학 과정’을 듣고 있는 선정숙 씨(왼쪽)가 서울시립대 이익주 교수에게서 고려말의 역사에 대해 배우고 있다. 이동영 기자
4일 ‘서울시 희망의 인문학 과정’을 듣고 있는 선정숙 씨(왼쪽)가 서울시립대 이익주 교수에게서 고려말의 역사에 대해 배우고 있다. 이동영 기자
서울시, 저소득층-노숙인 1300여명 대상 개설
수강생들 “더불어 사는 용기 찾았다” 감사 편지

학교에 가본 적이 없고 평생을 단칸방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선정숙 씨(61·여)는 4일 오후 4시 입시생처럼 눈에 잔뜩 힘을 주고 대학교수님이 가르치는 역사 수업에 몰두했다. 그는 서울 동대문구 장안1동 장안종합사회복지관에서 매주 두 번 열리는 ‘서울시 희망의 인문학 과정’을 수강하고 있다. 철학 문학 역사 등 인문학 강좌와 재무컨설팅, 저명인사 초빙강의 등이 주요 과목이다.

“먹고살기도 힘들 텐데 한 푼이라도 더 벌지 왜 이런 수업에 참여하냐고요? 저는 이 수업을 들으면서 평생 처음으로 내 인생 목표가 생겼고, 희망이 보입디다.” 그녀가 이 강의를 듣는 이유다.

○ 작은 희망을 보여주는 강의

선 씨는 장애인복지시설 주방에서 일하며 매달 65만 원을 받는다. 단칸방 월세 20만 원을 내고 나머지 돈으로 몸이 편치 않아 쉬고 있는 남편과 한 달을 버텨야 한다. 쉬는 날에는 재활용품을 수거해 벼룩시장에 나가 파는 일도 했다. 공연도 보고 싶었고, 도서관에도 가보고 싶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날 길 없던 가난의 굴레는 그에게 배움의 시간을 주지 않았다. 서울시가 4월부터 ‘희망의 인문학 과정’을 개설한다는 소식을 직장에서 듣고 그는 곧바로 신청했다. 저소득층이나 노숙인이 수강대상이며 문학 철학을 가르쳐 주고 때때로 유명인사 강연이나 공연장 현장 교육도 한다는 말에 그는 어린아이처럼 들떴다고 한다.

“이런 과목은 번듯하게 사는 사람들만 배우는 건 줄 알았거든요. 당장이야 어렵겠지만 나도 철학 역사를 배우고 나면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면서 사는 방식도 배우고, 내 형편도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이 들었어요.”

한 달 벌어 한 달 먹고사는 게 전부인 줄 알았던 그는 이제 수시로 ‘미래’와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내년에는 작은 분식집을 하나 낼 수 있도록 내 평생 처음으로 통장을 만들어 저금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 희망의 인문학? 인문학의 희망?

오세훈 서울시장은 지난달 20일 경희대 평화의 전당에서 열린 ‘희망의 인문학 과정’ 일일 강사로 나서 강의를 듣고 있는 1300여 명의 수강생에게 강좌 개설 이유를 설명했다. 오 시장은 판자촌을 전전하며 가난하게 살았던 자신의 성장과정을 설명하면서 “일시적인 지원보다 가난을 벗어나겠다는 의지를 키워주는 게 중요하다”며 “인문학 강좌는 남들과 더불어 사는 법을 알려주고 미래의 희망을 키워주는 토양이기 때문에 꼭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4일 복지관에서 선 씨 등 10여 명의 수강생을 가르치던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이익주 교수(47)는 “선 씨는 인문학으로 희망을 배웠다지만 나는 이 수업이 인문학의 희망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대학에서는 인문학이 실용학문에 밀려 있는 게 현실. 하지만 이 강좌에서는 자신의 ‘사회적 위치’가 아닌 자아를 살펴보게 함으로써 남들과 더불어 살아갈 용기와 희망을 갖게 해 인문학의 가치를 잘 보여준다는 게 이 교수의 평가다. 4개 대학에서 지역별로 모두 1300여 명의 저소득층 주민을 대상으로 한 인문학 강좌(6개월간 120시간)를 지원하고 있는 서울시는 내년에는 수강생을 1만여 명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이동영 기자 arg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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