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변협회장… 前국정원간부…
“민주주의 절차 지켜라”거물 주민들‘한말씀’씩
2일 오후 7시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주민자치센터. 대기업 임원, 변호사, 의사, 전직 국가정보원 비서실장 등 압구정 현대아파트 주민 150여 명이 속속 모여들었다.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유명인사도 눈에 띄었다. 주민들이 모인 이유는 이 아파트 단지 주민을 대표하는 동 대표 전체 회장의 임기 문제를 놓고 토론을 벌이기 위해서였다. 현재 동 대표 회장을 맡고 있는 신모 씨가 회장 임기를 2년에서 무제한으로 연장할 수 있도록 아파트 관리 규약을 고친 것이 발단이었다.
모임의 명칭은 주민 토론회였지만 제대로 된 토론은 이뤄지지 않았다.
“3분 질문에 3분 답변으로 제한합시다.” “동 대표 회장 심경 발표하라고 시간 줬습니까? 묻는 말에 대답만 하세요.” 어떻게 회의를 진행할 것인가를 두고도 한참 설전이 오갔다. 모두들 점잖은 옷차림이었지만 토론회에서 오간 말은 그렇지 못했다. 자기주장이 옳다며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고 감정이 격해지자 ‘이놈’ ‘저놈’ 하는 막말도 등장했다. 30여분 동안 거친 말이 오가고 나서야 회의장 분위기는 겨우 가라앉았다.
이 아파트 주민이자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을 지낸 원로 변호사가 나서 “동 대표 회장 임기를 늘리는 문제가 주민들에게 충분히 공지가 되지 않아 법적으로도 절차상의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이어 규약 개정에 반대하는 주민 모임 대표가 마이크를 넘겨받았다. 정치학 박사로 모 대학 사회과학대 학장을 지낸 그는 “민주주의는 의사 결정을 하는 개인이 이성적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뒤따른다. 우리에게 공개 토론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는데 이것이 민주주의인가?”라고 가세했다. “독일 나치즘, 이탈리아 파시즘도 모두 그런 식이었다. 투표 결과만 보면 90% 이상의 국민이 찬성했으니 북한의 3대 세습도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는 논리냐”라는 열변에 참석한 주민들은 “옳소!”를 외쳐댔다.
이곳 주민들이 무보수 명예직인 아파트 동 대표 회장 자리를 둘러싸고 옥신각신하고 있는 이유는 아파트 재건축 문제 때문이라는 게 주민들의 얘기다.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는 지은 지 30년이 넘어 재건축 이야기가 모락모락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재건축이 진행되면 주민들 사이에 이해관계가 엇갈리기 때문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다툼이 벌어지게 됐다는 것이다. 토론회가 끝난 뒤 한 주민은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에 산다고 하면 다른 사람들의 보는 눈이 달라지는데 이런 분쟁이 일어나 창피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다툼도 아파트 주민들에게는 도움이 되기도 한다. 인근 부동산 중개인은 “갈등이 불거지면 아파트 재건축이 임박한 듯한 분위기가 조성돼 아파트 값이 실제로 오르기도 한다”고 귀띔했다.
이 아파트에는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적지 않게 살고 있다.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주민으로서의 자부심도 강한 편이다. 하지만 이날 일부 주민이 보여준 모습은 재건축을 둘러싸고 고성이 오가는 여느 아파트 주민 총회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한 주민은 “사회 저명인사라는 사람들도 아파트를 놓고 밥그릇 싸움하는 건 마찬가지”라며 씁쓸해 했다.
신민기 기자 mink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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