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고전여행]의무론

  • 입력 2008년 6월 16일 02시 57분


로마는 피루스 왕과 싸우고 있었다. 어느 날 왕의 부하 한 명이 로마 장군에게 찾아와 솔깃한 제안을 내놓았다. 자기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준다면 음식에 독을 풀어 피루스 왕을 죽이겠다는 것이었다. 그의 제안대로만 된다면 로마는 수많은 젊은이의 피를 희생시키지 않고도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로마 장군은 제안한 사람을 붙잡아 피루스 왕에게 보내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로마 원로원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로마인들의 ‘결벽증’은 한참 더 나아간다. 이번에는 카르타고와 다투던 때의 이야기다. 집정관인 레굴루스는 계략에 걸려 포로가 되었다. 카르타고는 레굴루스를 사절 삼아 로마로 보낸다. 붙잡힌 카르타고 장군들을 풀어주라고 로마 원로원을 설득하기 위해서다. 레굴루스는 만약 장군들이 풀려나지 않으면 다시 카르타고로 돌아오겠다는 맹세를 하고 길을 떠난다. 하지만 로마 원로원에 선 레굴루스는 포로들을 풀어주면 안된다고 주장했고, 결국 카르타고 장군들은 석방되지 않았다. 레굴루스는 끔찍한 고문과 죽음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약속대로 카르타고로 돌아간다. 소중한 조국을 배신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적과의 약속’도 어겨서는 안 된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키케로는 ‘의무론’에서 위의 이야기들을 여러 차례 소개 한다. 지당한 처신이었다는 평가까지 곁들여서 말이다. 어찌 보면 로마인들은 어수룩해 보이기까지 한다. 도덕과 약속이 소중하다고 해서 적에게까지 윤리적이어야 할 까닭이 있을까? 하지만 로마가 가장 훌륭한 제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렇듯 높은 도덕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키케로는 로마를 대표하는 정치가이자 철학자이다. ‘의무론’에는 로마의 정신이 오롯이 담겨 있다. 그는 도덕과 이익은 결코 부딪치지 않는다고 힘주어 말한다. 도덕적인 것은 결국 이익이 된다는 것이다. 온갖 속임수를 부려 왕이 된 이의 예를 살펴보자. 과연 그는 행복할까? 언제 자신의 잘못이 드러날지, 누군가 자신을 해치지 않을지 하는 걱정으로 밤을 지새우게 될 것이다.

뇌물과 꼼수로 적을 이겼을 때도 마찬가지다. 옳은 명분을 위해 정정당당히 싸운 전쟁은 모두의 지지를 받는다. 이유가 정당했기때문에 패한 나라의 시민들도 결국 로마의 뜻을 받들었다. 하지만 적의 왕을 몰래 죽이는 방법으로 적을 눌렀다면 로마에 대한 반감은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도덕적이지 못한 행동은 결코 이익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익인 듯 보이는 일’을 위해서 파렴치한 짓도 서슴지 않는다.

나아가 그는 국가에 대한 의무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심지어 부모 형제에 대한 사랑보다 국가에 대한 의무를 더 높게 꼽는다. 그는 친구의 옳지 못한 행동을 두둔하는 사람을 예로 든다. 이는 결코 우정이 아니며, ‘음모를 꾸미는 사람들끼리의 관계’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진정한 친구라면 옳고 그름을 가리는 데 더 힘을 써야 한다. 가깝다는 이유로 정의를 무너뜨린다면 공동체는 이내 깨지고 말 것이다. 법과 국가가 옳다는 믿음이 무너지면 누구나 자기의 이익만 좇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누구에게도 이롭지 못하다.

키케로의 ‘의무론’은 서양의 ‘논어’라는 평가를 받곤 한다. 키케로는 이 책에서 로마의 무너지는 도덕을 보며 한숨을 내쉰다. 하지만 그의 시대는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는 대제국으로 떠오르던 때였다. 성적에 가장 민감한 학생은 꼴찌가 아니다. 1등 하는 모범생이 성적에 가장 관심이 많다. 마찬가지로 도덕을 걱정하는 사회는 건강하고 생기가 넘친다. 치솟는 석유 값과 가라앉는 경제보다 ‘도덕 불감증’이 더 심각한 문제다. ‘의무론’은 님비(NIBBY)가 판치는 우리 사회가 가슴에 새겨야 할 고전이다.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 철학박사 timas@joongdong.org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