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역사에서 논술의 길 찾기]명성황후의 외교정책

  • 입력 2008년 6월 9일 03시 01분


비운의 명성황후

실익외교 헌신한 국모? 특권유지 급급했던 왕비?

명성황후는 흥선 대원군의 실각 이후 국내 정치를 좌지우지할 정도의 힘을 가졌었지만 한국을 지배하려는 일본에 의해 비참하게 살해된다. 명성황후라는 칭호는 1897년 고종이 조선의 국명을 대한제국으로 바꾼 후 을미사변으로 죽은 민비에게 수여한 명칭이다.

명성황후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상반된다.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 국모라는 평가가 있는 반면 자신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 외세를 끌어들인 부패한 지배 계층일 뿐이라는 견해도 있다.

명성황후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녀가 강력한 정치력을 발휘했던 시기의 역사적 배경을 면밀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1863년 고종의 섭정으로 권력을 장악한 흥선 대원군은 세도정치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개혁을 추진하고 많은 지지를 얻었다. 하지만 경복궁 중건으로 백성들에게 큰 짐을 지웠고, 서원 철폐 조치로 인해 양반 유생들로부터 지지를 잃게 된다.

1873년 대원군은 실각을 하고, 명성황후의 외척가문인 민 씨 일파가 정권의 핵으로 떠오른다. 민 씨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갖가지 정치적 폐단이 만연하게 된다. 이러한 시점에서 운요호사건이 터지고, 1876년 최초의 근대적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이 체결됐다. 민 씨 정부는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해 근대적 개혁을 관장하게 했고,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는 등 개화 정책을 추진했다.

구식군대는 별기군과의 차별대우로 불만을 품고 있었다. 구식군인들은 13개월 동안이나 급료가 밀렸다가 지급된 쌀에 모래와 겨가 섞여 있는 것에 격분했고, 1882년 임오군란을 일으켰다. 조선 민중은 준비 없는 개항 결과 삶이 더욱 어려워지자 군인들의 반란에 대거 합류했다.

상황이 걷잡을 수 없게 되자 고종은 대원군에게 사태 수습을 위임했다. 하야 8년 만에 정계에 복귀한 대원군은 우선 민비가 죽었다고 발표하고 위장으로 국장을 치렀다. 국상을 발표함으로써 군졸들의 난동을 중지시키고 민비가 살아있다 하더라도 이미 죽은 것으로 함으로써 향후 정치에 대한 그녀의 영향력을 제거하려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대원군은 민비의 부탁을 받은 청나라의 이홍장에게 납치당해 집권 33일 만에 또다시 축출된다. 조선 말기의 정치적 격변기에도 민비는 정치적 야심을 버리지 않고 시아버지인 대원군과 대립하며 정치적 책략을 능란하게 구사한다. 민비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그 다음 시기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

1894년은 격동의 해였다. 그해 봄부터 시작된 동학농민운동이 삼남 지방을 뒤흔들었다. 민씨 정부는 관군만으로 농민군을 진압할 수 없게 되자 또다시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했고, 일본 역시 청을 견제하기 위해 인천에 군대를 상륙시켰다. 이후 청나라와 일본은 동학 농민군이 스스로 해산을 결정했음에도 한반도 지배를 두고 한바탕 전쟁을 벌인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에 요동반도 등 넓은 영토와 엄청난 배상금을 받아내었을 뿐 아니라 조선에 대한 지배권도 굳혀 나갔다.

일본의 이러한 독주는 조선에 눈독을 들이던 러시아를 비롯한 다른 제국주의 열강을 크게 자극했다. 가장 먼저 일본에 제동을 건 세력은 제정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1895년 4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요동반도를 청에 돌려주라고 일본에 압력을 넣었다. 아직 러시아와 싸워 이길 만큼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던 일본은 어쩔 수 없이 3국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를 계기로 조선은 러시아와 일본을 중심으로 제국주의 열강의 싸움터가 되고 만다.

민비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그녀가 택한 외교정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나라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끼어 곤경에 처하자 민비는 매우 민첩한 외교 능력을 발휘한다. 1885년 거문도 사건이 일어나자 묄렌도르프를 일본에 파견하여 영국과 사태 수습을 협상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러시아와 접촉하고 청나라와의 관계에서도 흥선 대원군의 환국을 묵인하는 등 유연성 있는 관계를 유지하는 현명함을 보였다. 일본의 야심을 간파하고 친러 정책을 쓰면서 일본에는 노골적으로 대항하는 의지를 표출하였다. 민비의 정책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은 조선과 같은 약소국이 열강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들 간의 분열을 이용하고 자신의 보호국이 되어 줄 열강을 찾는 길이 최선이었다고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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