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잃은 이주여성 레니카씨의 ‘특별한 크리스마스’

  • 입력 2007년 12월 24일 20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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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엄마! 정말 산타가 오셨어요."

다섯 살짜리 애빈이는 산타클로스 옷을 입은 사람들이 마당에 들어서자 깜짝 놀라 엄마 레니카 지반카야(31) 씨를 불렀다. 초등학교 1학년인 언니 수윤이는 하얀 수염을 단 산타가 "메리 크리스마스"라며 손을 흔들자 수줍은 표정으로 엄마 뒤로 숨었다.

크리스마스이브인 24일 오후 전남 담양군 대덕면 상운마을 레니카 씨의 집에 특별한 손님들이 찾아왔다. 선물보따리를 들고 온 이들은 GS칼텍스 광주전남지역 사회공헌활동 모임인 '빛고을 봉사단'의 단원들.

봉사단원들은 부끄러워하는 애빈이, 수윤이를 번쩍 들아 안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애빈이와 수윤이는 무슨 선물을 받고 싶어요?"

산타클로스로 분장한 김동완(29·GS칼텍스 광주저유소) 씨가 선물 보따리를 풀면서 말을 걸자 애빈이가 "인형하고 학용품하고…"라며 손을 꼽았다. 김 씨가 건넨 인형을 받아든 애빈이는 "정말 인형이네"라며 뛸 듯이 기뻐했다. 레니카 씨가 서툰 한국말로 "고맙다고 인사해야지" 하자 자매는 '배꼽인사'를 하며 김 씨 품에 꼭 안겼다.

빛고을 봉사단은 남편 주모(35) 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생계가 막막해진 국제결혼 이주여성의 안타까운 사연을 전해 듣고 이날 깜짝 이벤트를 준비했다.

방열중(57) GS칼텍스 광주저유소장은 "아이들 표정이 어두우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밝고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인다"고 말했다. 봉사단은 난방비를 아끼려고 전기장판을 깔고 사는 이 가족이 겨울을 따뜻하게 날 수 있도록 난방유도 무료로 공급할 계획이다.

필리핀 출신인 레니카 씨는 8년 전 한국으로 시집왔다. 딸 둘을 낳고 화목하게 살던 레니카 씨에게 불행이 찾아온 것은 10월 12일.

소 값이 떨어지고 빚이 늘자 남편 주 씨가 극약을 마시고 목숨을 끊었던 것. 남은 것은 은행 빚 6800만 원과 소 21마리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집 주인까지 바뀌어 살던 집을 비워줘야 할 형편이었다.

하지만 레니카씨에게는 따뜻한 이웃이 있었다. 수윤이가 다니는 만덕초등학교 학생들은 지난달 돼지 저금통을 털어 83만 원을 보내왔고 교직원과 학부모들도 230만 원을 보탰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까지 레니카 씨 가족을 돕기 위해 나섰다.

광주에서 철물상사를 운영하는 남장희(61) 형제는 1050만원을 보내왔다. 이 돈으로 레니카 씨는 살고 있는 집터를 사들여 등기도 했다.

광주지역 봉사단체인 '광주사랑회'와 대덕면사무소는 냉장고, 전기난로, PC를 선물했다. 담양군은 내년에 레니카 씨의 낡은 집을 허물고 새 집을 지어주기로 했다.

이 마을 김용각(67) 이장은 "상냥하고 부지런한 레니카 씨가 남편을 잃은 후 바깥출입을 거의 하지 않고 웃음마저 잃어 너무 안쓰러웠다"며 "내년에 집을 지을 때 주민들이 아담한 담장을 쌓고 작은 화단도 만들어줄 계획"이라고 말했다.

레니카 씨는 이제 키우던 소를 팔아 빚을 거의 다 갚았고 일자리도 구했다. 그는 "어린 딸들을 데리고 살 일이 막막했는데 주위 도움으로 다시 꿈과 희망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요즘 레니카 씨는 밤마다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서툰 글씨로 감사의 편지를 쓰고 있다.

"정말 힘들고 괴로웠습니다. 그렇지만 수윤이, 애빈이랑 잘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잘 키우고 대학도 보내고 시집갈 때까지 잘 키울 거예요…. 여러분 감사합니다."

담양=정승호기자 sh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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