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영화, 생각의 보물창고]‘영웅’

  • 입력 2007년 10월 29일 03시 01분


《아, 벌써부터 가슴이 쿵쾅쿵쾅 뛰어 옵니다.

중국 장이모우(張藝謀) 감독의 2002년 작 ‘영웅’을 생각하면 말입니다.

특히 수백만 개의 화살이 일제히 하늘을 가르고 날아가 빗줄기처럼 쏟아지는 순간은 영화사에 남을 명장면이지요.

그런데 혹시 여러분은 이런 생각, 해 보았나요?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어마어마한 스케일과 화려한 화면 속에는 무지하게 위험한 사상이 숨어있단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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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통일 이룬 진시황 미화 뒤엔 교묘한 중화사상

[1] 스토리라인

2000년 전. 중국대륙은 ‘전국 7웅’이라고 불리는 일곱 국가가 패권을 다투고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진나라의 왕 ‘영정’은 나머지 국가들의 수많은 암살 기도의 표적이 되어 왔지요. 영정 왕에겐 진정 두려운 자객들이 있었으니, 전설적인 무예를 지닌 세 명의 자객 ‘장천’과 ‘파검’(량자오웨이·梁朝偉), 그리고 ‘비설’(장만위· 張曼玉)이었습니다.

어느 날 영정 왕 앞에 이름 없는 장수 ‘무명’(리롄제·李連杰)이 나타납니다. 그는 장천, 파검, 비설이 제 몸처럼 아끼던 무기를 증거로 내놓으면서 “세 명을 내 손으로 죽였다”고 밝힙니다.

기쁨에 겨운 영정 왕. 그는 무명이 어떻게 전설의 무사들을 해치울 수 있었는지를 듣기 위해 자신의 열 발자국 앞으로 부릅니다. 왕의 목숨을 노리는 자가 너무도 많았기에, 그 누구도 근접하도록 허락받지 못했던 터인데 말입니다. 무명은 장천의 창을 피해 그를 무찌른 얘기며, 연인 사이였던 파검과 비설을 이간질해 서로 죽고 죽이게 만들었던 사연을 늘어놓습니다.

하지만 왕의 표정이 달라집니다. 왕은 그 어떤 무사도 이들 전설의 자객을 이기는 게 불가능하단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죠.

비로소 왕에게 진실을 밝히는 무명. 그는 알고 보니 모국인 조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영정 왕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던 겁니다. 자, 왕의 10보 앞에 선 무명. 그는 과연 영정 왕의 가슴에 비수를 꽂을까요?

[2] 핵심 콕콕 찌르기

‘영웅’은 숨이 막힐 만큼 아름다운 미학적 완성도를 보여 줍니다. 특히나 말하는 사람(화자·話者)에 따라 화면 색감이 붉은색, 푸른색, 흰색으로 바뀌는 비주얼은, 파검과 비설의 안타까운 러브스토리와 어우러져 더욱 압도적으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우린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이 영화는 기막히게 아름다운 화면과 애틋한 이야기 속에, 은근슬쩍 무시무시한 메시지를 숨겨놓고 있기 때문이죠.

자, 영화가 말하는 ‘영웅’이란 과연 누구일까요? 파검과 비설 같은 전설적 자객들일까요? 조국의 원수를 갚기 위해 분연히 일어선 무명일까요?

아닙니다. 영화가 강조하는 진정한 영웅은 다름 아닌 영정 왕이었습니다. 무명과 파검과 비설이 그토록 제거하고자 했던 그 인물 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평생 영정을 죽이기 위해 와신상담(臥薪嘗膽)해 온 파검. 그는 다년간의 서예 수련을 통해 비로소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되는데요. 파검이 “서예에서 터득한 진리”라면서 무명에게 보여 준 자신의 글씨 두 글자에 그 깨달음은 농축돼 있습니다. 두 글자는, 이것이었습니다.

‘천하(天下).’

그렇습니다. ‘천하’야말로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어였습니다. 수백 년간 하나의 패권을 두고 서로 죽고 죽여 왔던 피의 땅, 중국대륙. 사분오열된 중국을 명실상부한 하나로 만듦으로써 ‘천하통일’이란 위업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사사로운 복수보다 백 배 천 배 중요하단 사실을 파검은 깨닫게 되었던 것이지요.

무명은 파검의 말을 전하면서 왕에게 말합니다.

“파검은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린 오랜 전쟁을 오직 진나라만이 종식시킬 수 있고 진나라만이 천하를 통일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천하통일이란 대의를 위해 영정 왕을 암살하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곤 무명 자신도 영정 왕을 겨누었던 칼끝을 스스로 내리고 뒤돌아서 죽음을 맞아들입니다. 이렇듯 영화는 영정 왕이야말로 천하를 통일하고 중국대륙에 평화를 가져다 줄 진정한 영웅이었단 사실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영화가 끝날 무렵 나오는 다음 자막은 영화의 메시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기원전 221년 진나라는 마침내 중국을 통일했으며, 만리장성을 쌓아서 나라와 국민을 보호했다. 진의 왕은 중국 역사상 최초의 황제가 되었으니, 그가 바로 진시황이다.’

[3] 더 깊이 생각하기

하나 된 중국, 하나의 리더, 그리고 일치된 중국의 힘. 이를 강조하는 영화 ‘영웅’이 도대체 뭐가 잘못된 것이냐고요?

물론 천하를 하나로 만들어 평화를 가져온다는 설명은 멋지게 들립니다. 하지만 이 말은 진정 옳은 걸까요? 무명은 왕에게 말합니다.

“파검은 ‘한 사람의 고통은 온 천하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고 했으며, 조나라와 진나라 간의 원한도 ‘천하’라는 대의(大義) 아래선 사소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아, 얼마나 위험천만한 생각인가요? 천하통일이라는 ‘대의’를 위해선 개인의 희생은 얼마든지 합리화될 수 있단 얘기잖아요? 천하라는 ‘목적’을 위해선 어떤 ‘수단’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주장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영화가 전파하고자 하는 중심 사상을 제대로 간파하게 되는데요. 바로 ‘중화(中華)’입니다. 중화. ‘중국만이 세상의 중심이고, 중국만이 세계 최고의 문명을 가졌다’는 자기중심적 이데올로기 말입니다. 과거 그들이 우리 민족을 ‘동이(東夷·동쪽에 사는 오랑캐)’라고 부르며 오랑캐 취급을 한 것도 모두 이런 사고방식의 소산이지요.

요즘 중국을 보세요. “중국이 세상의 중심을 되찾자”며 ‘중화’를 노골적으로 표방합니다. 그러면서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역사왜곡 프로젝트를 통해 ‘지금 중국 국경 안에 있는 모든 사람과 땅의 역사는 고스란히 중국의 역사’라는 주장을 일삼습니다. 고구려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려 하면서 말이지요.

이렇듯 ‘영웅’은 중국 정부의 ‘중화’ 이데올로기를 설파하고 있었습니다. 이 영화를 연출한 장이모우 감독이 내년 중국 베이징에서 열릴 ‘2008 베이징 올림픽’의 개막식 연출을 맡게 되었단 사실도 우연이라고만 볼 수는 없는 겁니다.

여러분, 영화는 우리의 심금을 울립니다. 때론 무척 신나고 재밌습니다. 하지만 잊지 마세요. 어떤 영화들은 아름다운 화면으로 우리의 눈을 속이면서 속으론 교묘하게 선동하고 있단 사실을 말입니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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