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 떼려다 ‘더 큰 혹’ 붙인 건설업체

  • 입력 2006년 8월 7일 03시 07분


“시위를 하면 합의금을 받을 수 있다지 뭡니까.”

지난해 6월 서울 강북구 번동의 한 동네는 이상한 소문으로 들썩이기 시작했다. 동네 슈퍼마켓 주인인 오모(65) 씨 부부가 슈퍼마켓 인근에서 벌어지고 있는 터널굴착공사 현장에서 시위를 벌였더니 건설회사에서 돈을 줬다는 것이었다.

주민 20여 명은 “우리라고 가만히 있을 수 있느냐”며 공사현장으로 몰려갔다. 강북구 미아동 보승사에서 수유동 화계사까지 도로를 내는 공사 중 번동 지역의 터널굴착공사를 맡은 H종합건설은 아연실색했다.

소문의 진실은 이랬다.

지난해 3월 오 씨는 터널공사로 소음과 함께 먼지가 심하게 일자 부인을 데리고 공사현장에 가 시위를 벌였다. 같은 달 12일부터 9일간 공사장비 앞에 드러누워 영업 손실을 보상하라고 요구한 것. 예정된 공사기간이 빠듯했던 H건설은 오 씨에게 중재안을 내놓았다.

공사가 끝날 때까지 13개월 동안 매달 300만 원. 모두 3900만 원을 지급하겠다는 것. 단 조건이 있었다. ‘현장의 민원 해결을 약속하며 협조할 것.’ 오 씨는 흔쾌히 이 약정에 합의한 뒤 3개월간 300만 원씩 짭짤한 수입을 챙겨왔다.

하지만 이 얘기를 전해들은 주민들이 공사현장으로 몰려가면서 일이 틀어졌다.

H건설은 주민들의 시위를 막지 못한 책임을 오 씨에게 넘겼다. 민원 해결을 하지 못했으니 돈도 줄 수 없다는 것이 H건설의 주장.

당연히 오 씨는 펄쩍 뛰었다. 당시 약정 내용은 공사현장에서 자신이 시위를 중단하고 앞으로 다른 주민들의 시위가 있으면 이를 H건설에 알려주겠다는 취지였다는 것이다.

오 씨는 지난해 9월 H건설을 상대로 서울북부지법에 약정금 지급 소송을 냈다. 오 씨는 소장에서 “약정 체결 이후 시위를 하지 않았고 주민들의 시위 내용도 H건설에 귀띔해줬으니 H건설은 계속 300만 원씩을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달 26일 서울북부지법 민사7단독 민성철 판사는 고심 끝에 양쪽의 주장을 절반씩만 받아들였다.

민 판사는 판결문에서 “민원 해결이란 자신의 시위 중단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며 “다른 주민이 시위를 벌였으니 민원을 해결하지 못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민 판사는 “H건설이 오 씨가 다른 주민의 민원까지 해결해줄 수 있다고 판단한 것 또한 잘못”이라며 H건설에도 책임을 물었다.

결국 오 씨는 H건설로부터 3900만 원의 절반인 1950만 원만 받을 수 있게 됐다.

조은아 기자 ac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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