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오연천]갈등해결 새 모델 ‘방폐장 투표’

  • 입력 2005년 11월 4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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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 지역 주민투표를 통해 20년 가까이 ‘해묵은 숙제’인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처분장(방폐장) 부지 선정이 일단락됐다. 천년 고도(古都)의 경주가 이제 방폐장을 수용한 첫 번째 도시로 대내외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주민투표를 통한 방폐장 입지 선정은 국책사업 추진에 있어 갈등 해결의 새로운 모델을 보여 줌과 동시에 경쟁의 결과를 흔쾌히 수용하는 성숙한 시민의식의 유무를 시험하는 분수령이라고 볼 수 있다. 얼마 전 국회의원 재선거 때의 평균 투표율 39.7%를 월등히 능가하는 평균 60.3%의 투표율과 67.5∼89.5%의 높은 찬성률을 보였다는 사실은 앞으로 국책사업 수행 시 발생할 수 있는 사회적 갈등 요소를 완화,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통로가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새만금 간척사업, 천성산 터널공사, 경부고속철도 노선 결정 등 주요 국책사업을 추진할 때마다 많은 난항을 겪은 결과 국가자원의 낭비가 천문학적 수준에 이르게 된 사례가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 원자력 발전소를 가동하는 세계 31개국 중 폐기물 처분장을 건설하지 못한 곳이 우리나라뿐이라는 사실은 선진국 클럽이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국가로서 면목이 서지 않는 일이다. 현실적으로 보아도 전체 발전의 40% 이상을 원자력에 의존하는 우리나라가 원자력 발전을 당장 중단하지 않는 이상 발생되는 폐기물은 어느 곳에서라도 처리되어야 한다.

몹시 흥미로운 것은 1990년 안면도, 1995년 굴업도, 2003년 위도 사태 때는 유치 반대가 격렬했는데 이번에는 일부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유치 경쟁이 과열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특별지원금 3000억 원, 폐기물 반입수수료 연평균 85억 원, 한국수력원자력 본사 이전 등을 특별법으로 명시했던 것이 지역경제 활성화를 도모하는 지방자치단체들에 매력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위도의 경우에도 특별법 형태는 아니었지만 ‘3000억 원 지원금, 양성자 가속기 설치, 한국수력원자력 본사 이전’ 등 거의 비슷한 내용의 혜택이 제시됐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혜택을 놓고 지자체들이 서로 경쟁하도록 새로운 판을 짰다’는 것이다.

물론 특별법 입법과 경쟁 시스템을 통해 국책사업을 해결하는 방식이 최선인지 의문을 제기할 수는 있다. 따지고 보면 주민의 동의가 선행된 지역을 대상으로 기술적 경제적 타당성을 고려해 선정하는 것이 더 효율적인 방식이다. 그러나 지역 이기주의, 집단 이기주의, 금전 보상주의가 팽배한 우리 사회에선 투표와 찬성률로 결론을 내지 않으면 결정에 승복하지 않는 일이 빈번히 발생했다. 이번 해법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차선의 선택이었으며, 이를 통해 해묵은 사회적 갈등이 해결되는 물꼬가 트인 것이다.

일각에서는 유치 경쟁에서 탈락한 전북 군산시, 경북 영덕군, 포항시 등 3개 지자체 주민들의 불복을 우려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국민의 민주적 성숙도에 비춰 볼 때 탈락 지자체 주민들도 결과를 존중할 것이라 믿는다. 방폐장 유치를 지역 발전의 계기로 삼고자 했던 이들 지자체에 대한 배려도 고려해 봄 직하다.

그보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반원자력 단체가 관권투표, 부정투표 등을 거론하며 투표 무효화 투쟁을 벌인다는 소식이다. 하지만 이들 단체의 의도는 ‘관권투표의 문제를 제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결과에 대해서도 반대함으로써 아예 판을 깨려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민주사회에서 통용될 수 없으며 선진화를 가로막는 걸림돌이다. 반핵·반원자력이 해당 단체의 신념일 수 있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안 된다.

이미 언급했지만 이번에는 ‘차선의 해법’이 선택됐다. 앞으로 ‘최선의 해법’이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가 좀 더 성숙해지고, ‘국민 모두가 패자(敗者)가 되는 무한대결’을 지양하는 국민의식이 훨씬 견고히 뿌리 내려야 한다. 또한 이번 주민투표를 계기로 보상 만능주의가 국책사업 추진의 유일한 갈등 해결 방식이 되지 않도록 향후 국책사업 추진의 절차와 보상의 객관적 기준을 설정하는 노력이 전개돼야 할 것이다.

오연천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행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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