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진녕]원하는 것만 보려는 세상

  • 입력 2005년 2월 2일 18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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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있었던 재미있는 실험 하나를 얼마 전 TV에서 소개한 적이 있다.

사회자가 대형 스크린이 설치된 강당에 수십 명을 모아 놓고 문제를 냈다. 스크린에 등장하는 두 선수가 농구공을 몇 번이나 주고받는지를 알아맞히는 거였다. 두 선수는 온갖 묘기를 부려 가며 농구공을 주고받았다.

한참 후 사회자가 스크린을 끄고 한 사람씩 지명하며 농구공을 주고받은 횟수를 물었다. 거의 대부분이 정답을 말했다. 그러자 사회자는 다시 “스크린에 두 선수 말고 다른 이상한 것을 본 것이 없느냐”고 물었다. 사전에 전혀 예고하지 않았던 문제인지라 정답을 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회자가 다시 스크린을 켠 뒤 이번엔 아무런 목적 의식을 갖지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보도록 했다. 사람들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두 선수가 농구공을 주고받는 동안 고릴라 복장을 한 사람이 뒤에 등장해 이상한 포즈를 취하고 심지어 두 선수를 손으로 툭툭 치기도 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지만 보지 못했던 것이다.

이 실험은 사람이 얼마나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에 대한 집착이 강한지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즉 사람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보는 게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보는 경향이 강하다는 게 이 실험의 결론이다.

비록 작은 실험에 불과하지만 요즘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이념적, 사회적 갈등의 원인을 설명하는 데도 원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보수와 진보, 우익과 좌익, 개발과 보전 간의 끝없는 대립과 갈등은 사실 따지고 보면 지나칠 정도의 목적의식을 갖고 어느 한쪽만 바라본 결과가 아닐까.

갈등이 생기는 건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그것은 결국 이해당사자 서로가 자신이 보고자 의도하는 것만을 보고 또 그것만이 옳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1일 노사정위원회 복귀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민주노총의 대의원대회가 난장판이 된 것이나, 고속철도 천성산 터널 공사 중단을 요구하며 100일째 단식하고 있는 지율 스님의 경우도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정치가 민주화되고 사회가 발전하면 갈등이 줄어드는 게 당연한 이치일 텐데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늘어나는 것만 같아 안타깝다.

갈등을 조정할 사회적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거나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기본적으로 우리 사회에 타협과 수긍의 문화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최선의 갈등 해소법은 물론 이해당사자가 서로 타협을 이루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여의치 않을 땐 사회적 합의기관인 법원의 결정을 따르는 게 사회공동체 구성원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방식이 아닐까.

4일엔 또 하나의 사회적 불씨인 새만금간척사업에 관한 법원의 중대한 판결이 있다. 오랜 기간 정부와 환경단체가 줄다리기를 해 온 사안이라 어떻게 결론이 날지 주목된다.

결과가 어느 쪽에 유리하게 나오든 서로가 그에 수긍하고 자신이 아닌, 상대방이 보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헤아림으로써 조속히 갈등을 마무리 짓기를 기대해 본다.

이진녕 사회부장 jinny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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