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칙 정치집회’ 집시法 비웃는다

  • 입력 2004년 3월 23일 18시 3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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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탄핵소추안 통과 이후 전국 주요 도시에서 보수, 진보진영의 대규모 집회가 휴일마다 열리고 있다.

특히 20, 21일 서울 도심에서 연이어 열린 ‘탄핵무효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100만인 대회’와 ‘탄핵지지 국민문화 한마당’은 두 진영간의 극명한 대립각을 여실히 보여준 사례.

그러나 이들 집회는 모두 현행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규정을 피하기 위해 정치집회가 아닌 ‘문화행사’를 표방하고 있다. 이에 따라 집회 현장에서는 문화행사로 보이려는 기상천외한 방법들이 동원되고 있다.

문제는 경찰조차도 문화행사와 정치집회 사이에서 무원칙한 대응을 하고 있다는 점. 또 일부 전문가들은 현행 집시법 자체가 모호해 논란을 부추기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치구호는 태극기로 가렸다”=21일 오후 369개의 보수단체가 연 ‘탄핵지지 국민문화 한마당’은 문화행사란 이유로 아예 집회신고도 하지 않은 경우.

신혜식 반핵반김 청년운동본부장은 “가수를 초청해 건전가요를 부르는 문화행사로 같은 의견을 가진 시민들이 한자리에 모였을 뿐”이라고 말했다.

문화행사로 보이려는 주최측의 노력도 상당했다. 짙은 화장의 여성 행사도우미들이 무대 앞에서 춤을 추며 분위기를 띄웠다. ‘아 대한민국’ 등 대중가요만 흘러나왔고, 특정인물이나 정당에 대한 언급은 자제하려고 애를 썼다.

이날 연단에 오른 한 주최측 인사는 “4·15총선 때는 여러분이 알아서 뽑으라”며 “문화행사라 말은 못하지만 우린 다 알고 있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러나 경찰은 이날 행사를 정치집회로 규정하고 22일 집시법 위반 혐의로 주최측에 소환장을 보냈다.

이에 북핵저지 시민연대의 박찬성 대표는 “탄핵지지나 편파방송 중단 등 정치적 문구의 플래카드를 모두 태극기로 가렸는데 정치집회로 모는 것은 심하다”고 반박했다.

▽“딴나라당을 몰아내자”=21일 밤 서울 세종로 촛불집회는 야외콘서트장을 방불케 했다. 특히 유명가수들의 무대가 잇따르면서 축제 분위기가 고조됐다.

그러나 여기서도 감춰진 정치색은 곳곳에서 드러났다. ‘안중근, 이등박문(伊藤博文·이토 히로부미)을 죽이다’라는 큰 글씨 아래 조그맣게 ‘유권자, 한나라당·민주당을 죽이다’라고 쓰인 피켓이 등장했고, 참석자 사이에선 “집시법에 걸리니 ‘딴나라당’이라고 부르자”는 말이 오갔다.

행사 중반쯤 사회자는 “나라 망친 193마리의 개들을 국민의 손으로 몰아내자”고 말했으며, 한 농민단체가 참가자에게 주는 선물이라며 뿌린 손바닥 크기의 쌀 봉투에는 ‘썩은 정치 몰아내고 식량정치 지켜내자’라고 쓰여 있었다.

주최측인 범국민행동의 김혜애 공동상황실장은 “중요한 것은 정치적 내용이 아니라 문화행사라는 형식”이라며 “국민적 열망 속에 터져 나온 축제를 집시법이란 잣대로 구분하는 자체가 문제”라고 말했다.

▽애매한 집시법 적용=충남경찰청은 20일 오후 대전지역 범국민행동이 신고한 야간 촛불집회를 “야간집회를 개최할 ‘부득이한 경우’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허했다.

이는 다른 지역에서 문화행사를 표방한 촛불집회가 사실상 허용돼 온 것과 배치되는 것으로 “경찰조차 명확한 잣대가 없다”는 비판을 받았다.

게다가 일부에선 집시법상 야간 옥외집회 허용 여부는 관할 경찰서가 자의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연세대 김호기(金晧起·사회학) 교수는 “현행 집시법은 시민들의 불편을 최소화하는 데에 중점을 두고 집회 제한 요건을 명시하는 방향으로 개정할 필요가 있다”면서 “문화행사냐, 정치집회냐에 따라 합법 여부를 따지는 것부터 아이러니”라고 말했다.정양환기자 ray@donga.com

유재동기자 jarrett@donga.com

전지원기자 podrag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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