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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3월 3일 18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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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사람들을 위한 뉴딜(New Deal).’ 1933년 3월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뉴딜에 시동(始動)을 걸었다. ‘백일(百日)의회’로 불렸던 특별의회에서 일사천리로 개혁입법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뉴딜은 전혀 새롭지 않았다.
그것은 구(舊)대륙에서 한 세대 넘게 익히 알려진 사회 경제적 개혁안이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진보주의 시대로의 회귀였다. ‘자유방임’으로부터 자본주의의 궤도 이탈, 그 장기적 추세의 정점이었다.
문제는 속도였다. 수많은 개혁법안들이 성급하게 작성되고, 허약하게 집행됐으며, 서로 충돌했다. 효율성에도 의문을 남겼다. 루스벨트 재임 2기에 뉴딜은 더욱 과격해졌으나 공황을 중단시키지 못했다. 1938년 실업자 수는 다시 1000만명을 웃돈다.
뉴딜의 ‘실험’은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농민들에게 보조금을 주고 감산을 유도하고자 했던 ‘농업조정법.’ 막상 시행단계가 되자 농작물은 다 자라있었다. 정부는 이 풍요로운 수확물을 다 ‘갈아엎도록’ 권장했다. 당시 헨리 윌러스 농무장관의 말대로 그것은 ‘문명에 대한 충격적인 비평’이었다.
그러나 루스벨트에게는 천운(?)이 따랐다.
1939년 독일의 히틀러가 제2차 세계대전의 포문을 열면서 빈사지경의 미국 경제에 ‘전쟁특수’의 단비가 내렸다. 공장들이 막대한 양의 군수물자를 쏟아냈고 1000만 실업자는 방위산업분야로, 군 입대로 제 갈 길을 갔다.
“미국은 민주주의의 거대한 무기고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단순히 정치적 레토릭이 아니라 경제적 처방이었다.
뉴딜의 성공은, 만약 그것을 성공이라고 한다면, 루스벨트의 정치력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의 리더십은 한마디로 ‘전염성을 가진 낙관주의’로 요약된다. 그는 국민들에게 신뢰를 ‘감염’시키는 데 탁월한 지도자였다.
휠체어에 몸을 싣고 있으면서도 환한 웃음을 잃지 않았던 루스벨트. 미국인들은 그에게서 희망을 보았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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