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황호택/‘친구’ 언론, ‘반대자’ 언론

  • 입력 2004년 3월 2일 19시 00분


몇 해 전 지방도시에서 법조비리 사건이 터져 나오면서 법원 검찰 변호사들간에 얽히고설킨 공생사슬의 내막이 미주알고주알 언론에 보도됐다. 법원 검찰의 공직자들은 사건 초기엔 얼굴을 들 수 없을 지경이라며 부끄러움을 토로했다.

그러나 상당 기간 집중적으로 조명이 되자 법조계에서 분노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언론 보도의 과장성 무책임성을 비로소 알게 됐다.” “오보 사건이 법원에 들어오면 천문학적인 배상액을 맞을 줄 알라.”

이런 분위기의 연장선에서 현직 검사 22명이 법조비리를 보도한 언론사를 상대로 11억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취재기자들은 유죄 선고와 함께 법정구속을 당했다. 언론사는 유사한 민사소송에서 번번이 패소했다.

그러나 작년 9월 대법원은 공직자의 업무처리에 대한 언론의 감시 및 비판 기능을 인정하고 하급심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언론 보도가 악의적이거나 현저하게 상당성(相當性)을 잃은 것이 아닌 한 쉽게 제한해서는 안 된다는 요지였다.

며칠 전 대법원 3부(주심 고현철 대법관)가 내린 판결도 같은 맥락이다. 방송보도가 검사의 명예를 훼손한 점은 인정되지만 공직자의 업무처리에 대한 언론 감시기능의 중요성에 비춰 허용범위 안에 있다는 것이다.

대법원이 법조계 일각의 분위기에 흔들리지 않고 이 나라 언론자유 신장에 기여하는 판례를 남겼다는 생각이다. 민주주의 선진국에서는 공직자의 명예훼손을 부인하고 언론의 감시기능을 폭넓게 인정한 판례가 수없이 축적돼 있다.

세계 어디서나 공무원은 감추려 하고 기자는 그것을 찾아내는 직업이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이 앞장서 언론을 공격하고 소송을 내면서 정부의 기밀주의가 한층 심해졌다. 오죽하면 곽결호 환경부 장관이 언론의 취재요청에 성실히 응하라는 지시를 내렸겠는가. 민주주의와 국민의 기본권 신장을 위해 평생 투쟁했다는 노 대통령이 언론에 대해 적대적 발언을 되풀이하고 정부와 언론의 통로를 차단하는 일에 한동안 열중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언론과 정부 또는 정당과의 바람직한 관계는 어떠해야 할까. 언론이 정치권력의 친구가 되거나 일부러 반대자로 나설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언론은 반대자의 길을 가야 한다. 언론은 정치권력으로부터 특혜를 받거나 위협을 당하지 않고 뉴스를 수집하고 보도 논평하는 일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정부 들어 언론을 ‘친구’와 ‘반대자’로 나누는 편 가르기가 심해졌다. 노 대통령이 ‘언론과의 전쟁’을 선포한 이후 언론사를 상대로 한 공직자들의 소송이 한동안 줄을 이었다. 이 중 상당수는 언론사와 기자들의 보도활동을 위축시키려는 전략적 소송이었다. 검사처럼 작은 권력을 가진 공직자든, 대통령처럼 큰 권력을 가진 공직자든 친구는 좋아하지만 반대자로서의 언론은 싫어하는 모양이다. 이는 언론자유가 권력자의 아량과 관용에 의존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언론이 정치권력으로부터 천부적 권리를 방해받거나 위협당할 때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은 이를 수호하는 마지막 보루다. 대법원은 이번에 그것을 확인해 주었다.

황호택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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