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수록 바늘구멍' 이공계 취업현장]"명문대 졸업도 소용없어"

  • 입력 2003년 8월 26일 18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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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공계 졸업생들의 취업난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이른바 명문대를 졸업하고도 번듯한 직장을 얻기 어려워 4년 동안 배운 것을 포기하고 새로운 길을 찾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유학이나 대학원 진학도 단지 몇 년의 시간을 벌어 주는 ‘도피처’일 뿐 그것을 궁극적인 해결책으로 여기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사례 1:명문 모 대학 물리학과 졸업생 A씨. 그는 올해 2월 졸업 후 지금까지 경영대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물리학이 재미는 있지만 학부만 졸업해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고 말했다.

A씨는 2학년 때부터 진로를 바꾸기로 결심하고 인문계로 전과할 생각을 굳혔다고 한다. 명문대에 입학했다는 뿌듯함도 잠시. 친하게 지내던 선배들이 취업을 못해 과 사무실에 북적대고 치열해진 대학원 입시를 뚫기 위해 고생하는 모습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전공에 매달려서는 살 길을 찾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명문대 간판이 소용없다는 사실을 일찍 알게 됐어요.”

#사례 2:다른 대학 물리학과 졸업생 B씨는 올 봄부터 학원에서 중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그에게 학부 시절은 방황의 연속이었다. 군대를 마치고 돌아와 보니 취업은 ‘발등의 불’이었다.

“복학 뒤 처음에는 취업 준비를 좀 했죠. 그런데 취업 준비라는 게 4년 동안 대학에서 배운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더군요. 점점 수업에 들어가기가 싫어지더라고요. ‘내가 왜 생계에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 공부를 해야 하나’ 고민도 됐습니다. 학점도 나빠지고 자연히 취업은 더 어려워지더군요.”

벤처기업 몇 군데에는 일자리가 있었다. 그러나 초봉 2000만원도 안되는 곳에서 평생을 바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 비슷한 실력이었던 인문계 친구들이 대기업이나 금융기관에 취직하는 모습을 보니 더욱 작은 회사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 몇 차례 취업 도전에 실패하자 그는 ‘일단 시간이나 벌어보자’는 생각에 학원강사로 나섰다.#사례 3: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하고 내년 의대 편입을 목표로 공부를 하고 있는 C씨. 대학 입학 때만 해도 “난 의대 갈 실력이 되지만 공대가 더 좋다”고 큰소리 쳤는데 막상 지내보니 현실의 벽은 높았다.

“돈도 잘 벌고 싶고 사회적 지위도 누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여기 졸업해서는 길이 안 보여요. ‘대학 갈 때 왜 잘 선택하지 않았느냐’는 가족들 핀잔에 할 말이 없죠.”

그는 “공대 자연대에 나 같은 사람들이 널려 있다”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사례 4:올해 정부 부처 7급 공무원이 된 D씨.

“이것 저것 가릴 여유가 없었어요. 공무원은 그래도 안정적이니까 그나마 다행이죠. 운 좋게 대기업에 취직한 선배들도 다들 ‘우리는 10년 있으면 쫓겨날 것 같다’는 말만 해요.”

#사례 5:물리학과를 졸업하고 한의대 진학을 준비 중인 E씨. 그는 물리학 공부를 중단한 것에 대한 짙은 아쉬움을 토로했다.

“공부를 하다 만 느낌이죠. 나중에 기회만 되면 꼭 다시 해보고 싶은 학문입니다. 물리학이 사회에 꼭 필요한 기초학문이라는 확신에는 변함이 없어요.”

그러나 그에게 ‘학문에 대한 애착’보다 중요한 것은 ‘현실’이었다. 유학을 갈 만한 형편도 안됐고 앞으로도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세월을 비전 없는 공부에 바치기에는 미래가 너무 불투명했다. 그는 “한의사가 돼 돈을 벌면 나중에라도 꼭 물리학을 하고 싶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사례 6:대학원에 진학한 이들의 심정도 비슷했다. 올 가을 물리학과 대학원에 입학 예정인 F씨는 “사오정(45세면 정년퇴직), 오륙도(56세까지 일하면 도적) 같은 말은 이공계 출신 회사원에게 더욱 절실해지는 말”이라며 “석사가 돼 취직을 해도 장기적인 비전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박사학위를 받아 연구원이나 교수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F씨는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 박사학위 경쟁도 더 치열해졌지만 열심히 공부하는 방법밖에 없다”며 “실력이 없어 이공계를 선택한 게 아닌데 막상 취업전선에서 무시당하고 보니 비참한 심정”이라고 토로했다.

5개 대학 이공계 주요학과 올해 2월 졸업자 취업 현황

전공졸업자전공취업비전공취업대학원유학(준비)미취업군입대전공변경미확인
서울대컴퓨터공학부69 23 5 27 3 10 0 0 1
물리학과41 2 2 19 8 2 4 1 3
연세대컴퓨터공학부14673 3 36 2 21 10 1 0
물리학과43 4 7 15 2 9 4 2 0
고려대컴퓨터학과55 31 4 15 0 3 1 0 1
물리학과34 6 2 14 7 0 2 3 0
이화여대컴퓨터공학과56 34 2 13 2 5 0 0 0
물리학과12 3 0 5 1 1 0 1 1
한양대전자전기 컴퓨터공학부312 162 0 84 2 57 3 0 4
물리학과42 13

1 24 1 0 0 2 1
810 351 26 252 28 108 24 10 11
복수 전공자는 집계에서 제외, 고시준비, 타과 전과 등은 전공 변경으로 분류.

김선우기자 sublime@donga.com

유재동기자 jarret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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