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복 판사 '새가슴' 전문

  • 입력 2003년 7월 23일 15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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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복 판사 '새가슴…' 전문

새가슴을 가진 분에게

대전지방법원 금산군법원 판사 유재복

당신에게 경솔했던 것 같습니다. 당신은 예비군훈련에 불참한 죄로 제 앞에 섰습니다. 당신은 "일거리를 찾아 객지에 나가 있다보니 훈련에 불참하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당신의 말은 거짓이 아니라는 믿음을 주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사건이 많다는 핑계로 당신의 변명을 가로막고 바로 정형화된 벌금형을 선고하였습니다. 살인을 저지른 죄인에게도 변명의 기회를 충분히 주고 있는데 무슨 큰 죄라도 저지른 듯 조마조마하여 서 있는 당신에게 너무 소홀히 한 것입니다. 저는 측은지심을 가진 판사는 아닌 것 같습니다. 당신 같은 새가슴을 가진 분에게 제가 가지고 있는 그 알량한 권한을 남용한 것은 아닌지 마음에 걸립니다.

요사이 굿모닝시티분양사기사건으로 시끄럽습니다. 들추어보니 정-관계가 다 한통속이 되어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어우러져 서민들의 눈물어린 돈을 마치 제돈 쓰듯 서로 주고받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곳에도 내로라하시는 정치지도자가 관련되어 있어 더 눈길을 끕니다. 여당대표라는 분도 그 희대의 사기꾼으로부터 4억2천만원이나 되는 거금을 받았다 합니다. 그 분은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자숙하셔야 마땅할 터인데도 정치가금법의 위반사실이 없다며 '거짓이면 손가락에 장이라도 지지겠다'는 태도이시더니 그 중 절반이 넘는 수뢰혐의가 짙은 돈이 들통나자 이제는 사복을 채운 것이 아니라며 "죄없는 자 있으면 나서서 내게 돌을 던지라"며 검찰소환에도 불응하시고 어처구니없게도 율사출신 국회의워님이 더 앞장서서 너도나도 그분을 거들고 나서십니다. 힘없는 기초의원들은 경로잔치에 음료수 한 박스만 기부해도 선거법 위반으로 의법조치 당하는데도, 국회의원님들은 돈 받은 것이 문제되면 으레 정치자금인데 법이 잘못되어 수뢰혐의를 받고 있다고 법 탓을 하십니다. 그 법의 제정자가 누구인데 "법이 잘못되어 어기지 않을 수 없다"고 억울해 하시니 보통사람들로서는 헷갈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돌이켜보면 이것은 그 분들만이 비난받을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간의 지도자라는 분들이 법치보다는 정치만을 하시면 이 나라를 이끌어 온 결과일 것입니다. 그간의 최고지도자라는 분들을 보더라도, 어떤 분들은 혼자서만 대통령을 죽을 때까지 하시려고 초법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입맛에 맞게 헌법까지 뜯어 고치셨고, 어떤 분들은 닥치는 대로 돈을 챙겨 퇴임 후에도 계속 후견인 노릇을 하려 하셨고, 어떤 분들의 자제들은 그 분들의 꺼지지 않는 후광을 위하여 이 돈 저 돈을 주는 대로 받았다가 발각되기도 하셨습니다. 그 분들은 한결같이 변명하셨습니다. "결코 사복을 채우기 위한 수뢰가 아니다. 이 나라와 국민을 위하여 유용하게 쓰려 한 것이다"고. "목적이 정당하다면 이에 이르는 방법이야 불법이면 어떠냐?"는 사고방식은 이 나라 정치지도자들의 공통된 생각이셨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제가 마음에 걸리는 것은 당신도 혹시 예비군 훈련에 빠진 것이 병든 부모님의 치료비라도 마련하기 위한 효심 때문이었으면 어쩌나 하는 점입니다.

요새는 유명인의 일거수일투족이 국민일반에게 바로 전달되는 시대입니다. 유명 연예인의 말이 그대로 국민 일반의 일상용어가 되고, 헤어스타일이나 패션은 유명인의 그것이 즉시 모방되는 시대입니다. 얼굴마저도 유명인의 것으로 바꾸어 복제 아닌 복제인간이 허다한 세상입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우리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부정부패척결과 개혁을 소리 높여 부르짖지만 결국 파헤치고 보면 개혁해야 할 상대는 다름 아닌 바로 그분들 자신들이었음을 너무 자주 보아왔습니다. 정권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 정권의 수장이 영어의 몸이 되시는가 하면, 그분들의 아드님들이나 그분들을 보필하던 실세들이 줄줄이 구속되는 부끄러운 드라마를 반복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들을 고래나 상어쯤으로 여기시던 그분들은 법이란 멸치잡이용 어망정도로 생각하시었던 것 같습니다. 설마 당신도 그 분들의 추태를 보고 배운대로 별 것도 아닌 것으로 사람을 귀찮게 한다며 예비군 훈련통지를 무시한 것은 아니시겠지요.

법은 엄할 곳에서는 정말 엄해야 합니다. 불법에 관대하면 불법행위는 더욱 기승을 부리고 급기야는 통제불능이 됩니다. 당신도 법절차를 무시하고 너도나도 거리로 뛰쳐나오던 최근의 크고 작은 집단행동이나, 요사이 엉망이 된 기초 질서를 보시며 이 사실을 확인하셨을 것입니다. 주차난을 이유로 불법주차를 눈감아 주기 시작하면 아무리 넓은 도로도 주차장을 방불케 됩니다. 그런 곳에서는 불법유턴이나 무단횡단도 속출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난이 죄지'하는 동정심에서 노점상을 허용하기 시작하면 서로 앞다투어 고객이 많은 곳을 찾다가 심지어 사고위험지역인 횡단보도마저 침범한 채 그곳에 버젓이 트럭을 세워두고 물품을 늘어놓습니다. 나만 편하고 나에게 이득만 된다면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들일 것입니다. 이렇게 기초질서가 무너지는 것을 방치하면 일반국민들의 준법정신은 사라집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된다"는 속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기초질서 하나 지키지 않는 사람이 다른 법을 지킬 리 만무한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법망을 빠져나가려 할 것입니다. 그래서 기초질서부터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보고 만나는 사람들이 법을 지키지 아니하고도 당당하게 살아가는데 손해까지 보면서 법을 지키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는 자명한 이치입니다.

우리의 지도자들은 아마도 도덕불감증에마저 걸리신 것 같습니다. 그 분들은 거짓말을 너무도 잘 하십니다. 거짓임이 탄로 나도 너무 떳떳해 하십니다. 정말로 우리 모두가 무지렁이로 보이는 모양입니다. 미국의 워터게이트사건은 도청사건보다는 도청사건과의 관계를 부인한 부도덕성 때문에 결국 대통령이 사퇴까지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똑똑하신 그 분들이 모르실 리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분들은 참으로 큰 가슴을 가지신 분들이십니다. 누구라고 할 것이 없이 부정한 돈을 받은 혐의로 수사선상에 오르면 일단 부정부터 하십니다. 너무나 확신에 찬 모습이라서 꼭 음모가 있다는 생각이 다 듭니다. 그러나 거짓임이 탄로 나고, 명백한 증거로 옴짝달싹 못할 지경에 이르면 금방 말을 바꾸어 어설픈 변명을 하십니다. 이것도 통하지 않으면 마치 정치적 희생양인 양 억울해 하십니다. 토사구팽도 주장하십니다. 우리 같은 아마추어는 여간 정신차리지 않으면 진짜로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분들은 서로를 너무 잘 알기에 물귀신처럼 물고늘어져 같이 당하기 전에는 늘 불공정하다고 주장하십니다. 당신도 그 날 보셨을 것입니다. 앞차를 뒤따라 가다가 뒤따르던 자신만이 과속으로 단속되었다며 범칙금납부통고처분에 대하여 이의신청한 피고인의 침 튀기며 강변하시는 모습을 말입니다. 과속은 시인하면서도 자신만을 단속한 경찰관에게 증오심까지 보이는 당당함으로 인하여, 언뜻 보면 그 피고인이 참으로 억울하겠다는 생각마저 드셨을 것입니다. 그 피고인이 누구로부터 그러한 편리한 사고를 배웠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유명세가 붙으신 지도자들의 행동거지나 사고방식은 일반국민에게 그대로 전염되는 것입니다.

당신도 그분들로부터 배우신 대로 핑계를 대려 하였는지는 모릅니다. 부모님에게 짐만 되어 온 당신이 그럴듯한 연기를 하여 그 작은 처벌마저 면해보려고 하였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으려 합니다. 당신의 눈과 태도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당신의 새가슴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당신도 저와 똑같이 새가슴이었습니다. 승용차를 운전하다가 경찰관의 모습만 보아도 과속운행을 한 것도 아닌데도 머뭇거려지고, 어쩌다가 화가나 길거리에 가래침이라도 뱉게 되면 누가 볼세라 서둘러 발로 비비게 되고, 몇 푼 안 되는 재산세나 자동차세 고지서가 제 때에 나오지 아니하면 담당공무원에게 전화를 걸어서라도 알아보고야 마는 그런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그 깐 사건을 처리하면서…" 하는 남의 눈치를 애써 무시하고, "작은 사건일수록 더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며 늘 노심초사하는 저도 새가슴 중의 왕 새가슴이기에 그렇게 당신을 금새 알아본 것입니다. 늘 긴장하며 맡은 일을 성실히 수행하려는 마음, 아무리 사소한 규칙이라도 철저히 지키려는 마음, 자신에게마저 부끄럽지 않게 처신하려는 마음, 이러한 마음을 가진 새가슴들이 많아질수록 이 사회는 더 맑아지고 이 나라는 더 강건해지는 것이 아닌지요. 사람은 남과 부딪치며 살아 갈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의 이해가 상충하고 각자의 생각이 다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일 것입니다. 도덕률만으로도 질서가 바로 서고 서로가 화목하게 어우러져 살 수 있는 이상향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법입니다. 법은 우리가 필요해서 제정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법은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성숙한 민주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먼저 법치가 바로 서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법치를 측정하는 바로미터(barometer)가 기초질서라는 것은 저의 믿음이기에, 즉결사건도 엄정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저의 이러한 고루한 생각을 탓하지는 말아주시기 부탁드립니다. 그러나 제가 진정으로 부탁드리고자 하는 것은 경미한 법에 마저 경의감을 가지고 계신 당신의 새가슴을 결코 버리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2003. 7. 17. 제헌절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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