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의 그늘…30대 실직자 권총자살, 40대 가장 변사체로

  • 입력 2003년 4월 22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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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대졸 실업자가 권총으로 목숨을 끊고, 40대 가장이 2년여간 노숙자 생활을 하다 주택가 골목길에서 숨진 채 발견되는 등 21일 하루 쓸쓸한 죽음이 잇따랐다.

▽실업자 권총 자살=21일 오후 5시50분경 서울 서초구 서초동 예술의전당 뒤쪽 우면산의 대성사 입구 산책로에서 박모씨(37·서울 성동구 성수동)가 오른쪽 관자놀이를 총에 맞아 숨진 채 발견됐다. 박씨는 구인구직정보가 실려 있는 생활정보지를 깔고 앉은 자세로 숨져 있었다.

박씨가 갖고 있던 총기는 스페인제 9mm 라마권총이었으며 실탄 7발이 장전돼 이 중 한 발이 박씨의 관자놀이를 관통했다.

박씨는 ‘나는 무능력자다’라는 내용이 적힌 유서를 남겼다. 가족들에 따르면 박씨는 92년 서울 J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기 직전부터 한 대형 유통회사에 2년간 근무했으나 그 뒤로는 마땅한 직장을 구하지 못했다. 박씨는 일본의 대학원 진출을 위해 94년 연수를 떠났으나 시험에 실패하면서 96년 귀국했으며 그 뒤로도 7년째 실직 상태였다고 가족들은 말했다.

박씨는 유서에서 ‘남길 유산도 채무도 없으며 아쉬움도 없다. 어떤 불순한 단체와 관계한 적 없는 평범한 시민이다’라고 적었다. 또 ‘이 권총은 제조 습득된 이래 한번도 이용되거나 남에게 보인 적이 없다’고 덧붙였다.

경찰은 “박씨가 생활정보지를 바닥에 깔고 숨진 것은 실업에 대한 고민 때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경찰은 박씨가 권총을 구입한 경위를 조사 중이다.

박씨는 식당에서 일용직으로 일하는 어머니와 둘이 생활해 왔으며 취직한 형과 동생으로부터 ‘취직하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사회생활에 자신이 없다”며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고 가족들은 전했다.

▽노숙자 생활을 하던 가장=사업에 실패하고 잠적한 뒤 2년여간 소식이 끊겼던 40대 가장이 길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20일 오전 10시 반경 김모씨(47)가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한 주택가 골목에 쓰러져 숨져 있는 것을 근처를 지나던 집배원 오모씨(37)가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김씨의 시신에 외상이 없는 점으로 미뤄 지병 혹은 전날 내린 비를 맞아 저체온증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정확한 사인을 조사 중이다.

김씨의 아들(20)에 따르면 김씨는 2000년 11월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종업원 10여명의 금속세공 업체를 차렸으며, 다음해 자연석에 금과 은 등 금속을 입히는 ‘돌상감’ 기술을 개발해 특허를 출원하는 등 사업에 의욕을 보였다.

그러나 2001년 자금사정이 악화돼 업체가 부도나자 채권단의 압력을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간 뒤 노숙자 생활을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가장을 잃은 가족들도 식당에서 일당을 받고 생활하는 등 어려운 생활을 해 왔다는 것. 김씨의 부인 홍모씨(44·서울 강서구 화곡동)는 채권단이 차압을 하는 등 남편이 남긴 빚으로 고통을 받자 최근 이혼 절차를 밟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허진석기자 jameshuh@donga.com

전지원기자 podrag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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