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지하철 참사 한달]이문희대주교 “대구는 喪中 저는 喪主"

  • 입력 2003년 3월 16일 19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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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대구대교구장인 이문희 대주교가 15일 이번 참사로 드러난 우리 사회의 문제점과 치유 방안 등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고 있다. -대구=최재호기자
천주교 대구대교구장인 이문희 대주교가 15일 이번 참사로 드러난 우리 사회의 문제점과 치유 방안 등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고 있다. -대구=최재호기자
《‘2·18 대구지하철 방화 참사’가 발생한 지 한 달. 대구 시민들은 표면적으로는 일상의 삶을 되찾고 있으나 이번 사고로 입은 정신적인 내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모습이다. 정서적인 공황상태라는 말까지 등장했던 대구 시민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내일을 향한 용기와 희망을 주는 메시지를 듣기 위해 이 지역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는 천주교 대구대교구장인 이문희(李文熙·68·바울로) 대주교를 찾았다. 15일 오전 대구 중구 남산3동 천주교 대구대교구청 주교관은 숲에 둘러싸여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겼다.》

“어서 오세요. 서울에서 먼 데까지 오셨습니다.” 서너평 남짓한 주교관 3층 접견실에 들어서자 이 대주교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일행을 맞았다. 접견실은 낡은 책상과 책장, 그리고 구식 소파가 전부로 단출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하철 방화 참사가 일어난 지 어느새 한 달이 됐습니다. 대구 시민은 물론 전국의 많은 국민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준 안타까운 사고였는데요.

“처음엔 이 정도로 큰 사고인 줄 몰랐어요. 희생자가 너무 많은 것을 알고 며칠 동안 아무 말을 못하고 그냥 있었습니다. 사흘째 되던 20일에서야 시내 천주교회에 희생자를 위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천주교인부터 마음을 모아야겠다고 생각했지요.”

이 대주교는 언론과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는 편인데 이번에는 많은 사람이 마음에 상처를 받고 있어 이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될 수 있을까 하고 인터뷰 요청을 받아들였다고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대부분의 시민들은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지만 유족과 실종자 가족은 여전히 사고현장을 지키며 울고 있습니다.

“대구는 아직 상중(喪中)입니다. 장례 등 마무리 절차가 많이 남아 있는 걸로 압니다. 교황과 10여개국 주교들이 저에게 위로전문을 보내왔고요. 저도 저절로 상주(喪主)가 됐어요. 천주교적 시각이지만 희생된 분들은 하느님에게 갔다고 봅니다.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것이지요. 아울러 이번 참사 희생자들은 남아있는 모두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고 갔어요. 이분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다시는 이 같은 사고가 생기지 않도록 배우는 것이 남은 자들의 몫입니다.”

―사고 이후 수습 과정에서 대구시가 우왕좌왕하고 사고현장이 훼손되는 등 어처구니없는 일이 많았다는 지적입니다. 이런 미숙한 수습이 유가족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을 텐데요.

“참 뜻밖이었어요. 평소 대구시와 관계기관들이 대형사고를 예상한 대비 같은 건 전혀 안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갈수록 수습에 어려움을 겪는 것처럼 보였어요. 멀리 보는 준비가 안 돼 있는 것이지요.”

―책임자를 가려내 처벌하고 유족이나 실종자 가족에게 돈으로 보상하는 것으로 수습이 끝났다고 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듭니다.

“모두 정신을 차려야겠지요. 각자의 삶 속에 질서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때그때 순간적으로 대응하면서 살아갈 게 아니라 다음 순간을 예측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각자 하루하루 살아가는 모습을 돌아보세요. 너무 바쁘게 살아갑니다. 삶을 성찰해 볼 여유를 갖지 못할 정도예요. 우리 삶을 되돌아보고 다시는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수습이 될 것입니다.”

이 대주교는 “얼마 전 동화사 주지스님과 만나 삶의 모습을 바꾸는 것이 현실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지만 종교인들부터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고 소개했다.

―경찰의 수사 과정에서 지하철 운영 책임자들이 솔직하지 못한 태도를 보여 시민들의 비난을 사기도 했습니다. 무고한 시민들이 목숨을 잃은 대형사고가 났는데도 어떻게 이 같은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를 보일 수 있는 것일까요.

“생명에 대한 외경(畏敬)이 부족한 때문이라고 봅니다. 김수환 추기경께서도 대구에 오셔서 이런 점을 강조했습니다. 자신의 생명에 대해서는 강한 애착을 가지면서도 다른 사람의 생명은 대수롭지 않고 가볍게 여기는 분위기가 퍼져있는 게 문제지요.”

―이번 사고에 외국 언론도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합동분향소가 마련된 대구시민회관에는 일본 등 외국의 기자들이 많이 왔더군요. 국내 언론 못지않게 이번 사고에 큰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취재를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일본이나 유럽의 여러 나라는 이 같은 큰 사고에서 교훈을 얻기 위해 비디오를 찍어 자국 국민에게 자주 보여준다고 들었어요.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국민교육을 많이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어떻습니까. 덮어버리기에 바쁘지 않습니까. 이번에도 이런 모습들이 나타났고요. 이웃을 두려워하고 존중하는 정신이 부족하면 결국 우리 모두에게 피해가 돌아올 것입니다.”

―대구 시민의 기질적 특질이 어떻다고 생각합니까. 또 어떻게 해야 유족과 대구 시민들에게 진정한 위로가 될 수 있을까요.

“대구 시민은 한마디로 무겁습니다. 대구는 분지라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더운 곳입니다. 추워도 더워도 참아야 하는 풍토에서 대구 시민의 독특한 기질이 생기지 않았나 싶어요. 이런 모습이 꼭 단점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변화에는 좀 느린 게 아닌가 합니다. 대신 무거운 기질은 신중함으로 연결해 장점으로 살려야겠지요. 이번 사고를 계기로 대구가 전국에서 가장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곳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합니다. 꼭 유족과 대구 시민들만이 아니라 상처받은 이웃을 위로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관심과 애정을 보내는 것입니다.”

이 대주교는 한때 정치인이 되겠다는 뜻을 품고 경북대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했으나 ‘정치로서는 소외받고 어려운 사람을 구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서 졸업 후 사제의 길로 들어섰다.

―이번에 마음의 상처를 입은 국민이 정부나 정치를 더 불신하지는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얼마 전 새 정부가 출범했는데 세대간 갈등이나 이념적 대결이 더 심해지는 모습도 보입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들어보지도 않으려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요즘은 인터넷으로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대통령부터 어느 한 쪽의 목소리에만 너무 경도되면 갈등을 치유할 수 없다고 봅니다. 새 정부가 우리 사회의 이런저런 갈등을 얼마나 잘 껴안고 해소할 수 있을지는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침묵하는 다수가 무시돼선 안 되겠지요.

―현재 북한 핵문제로 모두가 걱정하고 있습니다.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도록 놔두면 결코 안됩니다. 일부 사람들은 북한이 핵무기를 만들면 결국 우리나라 것이 아니냐는 주장까지 합니다.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에요. 북한은 핵무기가 없어도 마음대로 하는 게 많은데 핵무기까지 가진다면 모두에게 비극이 될 수도 있습니다.”

―끝으로 우리 모두의 바람직한 삶의 자세와 관련해 한 말씀 해주십시오.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꾸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아요. 음식을 서로 나눠먹는 것처럼 생각하면 됩니다. 친지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번에 희생된 무고한 생명들이 우리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도 이런 것이겠지요.”

1시간반가량 이어진 대화를 마무리하면서 이 대주교는 “이번 참사를 통해 희생자들이 우리에게 남긴 고귀한 선물은 우리 모두가 타인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성숙한 사회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교훈”이라고 했다.

정리=이권효기자 boriam@donga.com

▼이문희 대주교는…▼

이문희(李文熙) 천주교 대구대교구장은 대구 출신으로 경북고와 경북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군복무를 마친 뒤 프랑스 리옹신학대학을 거쳐 65년 파리대학 신학부를 졸업하면서 30세에 프랑스에서 사제로 서품됐다. 공화당 국회의장을 지낸 고 이효상(李孝詳)씨의 차남이기도 하다.

72년 사제서품 7년 만에 37세 나이로 보좌주교에 서품돼 7대 교구장 서정길 대주교를 보좌하는 대구대교구 총대리로 임명됐다. 86년 51세에 제8대 대구대교구장이 됐다. 당시 교구장 착좌식에 참석했던 김수환 추기경은 이 대주교를 가리켜 ‘통속적으로 말하면 출세가 굉장히 빠른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93년부터 3년 동안 한국 천주교의 최고기구인 주교회의 의장을 맡아 일제강점기의 천주교에 대한 재평가 작업을 했으며 ‘천주→하느님’ ‘내 탓이오→제 탓이오’ ‘고성소에 내리시어→저승에 가시어’ 등 미사용어를 쉬운 말로 바꾸기도 했다. 신자가 40만명가량인 대구대교구를 17년째 이끌고 있으며 ‘밝은 날이 온다고 누가 알려줍니까’ 등 10여권의 책을 펴냈다.

▼大邱대교구는…▼

천주교 대구대교구는 서울 광주대교구와 함께 우리나라 천주교의 뿌리다. 1831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가 조선교구를 설정한 뒤 1886년 대구본당을 설정했다. 이때부터 김보록 신부가 전교활동을 시작했으며 1899년 대구 중구 계산동에 목조 성당을 신축했다.

1911년 교황 비오 10세는 대구대교구를 설정하고 조선교구에서 대구교구를 분리했다. 초대 교구장으로 드망즈플로리아노(안세화) 주교가 부임했다. 7대 서정길 대주교가 55년부터 86년까지 교구장을 맡았으며 이후 이문희 대주교가 임명됐다.

대구대교구는 132개 본당(대구시 70, 경북도 62개)과 신부 320여명이 있으며 신자수는 40만명가량으로 서울대교구 다음으로 규모가 크다. 대구대교구는 대구가톨릭대학과 17개 초중고교, 신문사(2) 방송사(1) 병원(5) 사회복지시설(50여곳) 등을 운영하고 있다.

정리=이권효기자 boriam@donga.com

만난사람=정동우 사회1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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