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이곳을 아시나요]인천 북성동 차이나타운

  • 입력 2002년 8월 9일 20시 22분


2000년 10월 인천역 건너편에 세워진 중국식 경계 표지 구조물 ‘패루’. 높이 11m, 폭 16m의 대형 구조물로 이 곳이 차이나타운의 입구임을 알리고 있다. (사진제공 인천 중구)
2000년 10월 인천역 건너편에 세워진 중국식 경계 표지 구조물 ‘패루’. 높이 11m, 폭 16m의 대형 구조물로 이 곳이 차이나타운의 입구임을 알리고 있다. (사진제공 인천 중구)
중국인들의 집단 거주지인 ‘차이나타운’(China Town)의 원조(元祖)는 어디일까?

현재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 1400여명으로 추산되는 중국인이 살고 있고 일부 자치단체가 중국 특수를 겨냥해 ‘차이나거리’ 조성을 추진하고 있지만 차이나타운의 원조는 역시 인천이다. 인천 중구 북성동과 선린동 일대에 분포한 차이나타운의 역사는 다른 지역보다 훨씬 앞선 1884년부터 시작됐다.

당시 현재의 인천화교학교(중구 선린동 8) 자리에 청나라 영사관이 들어서면서 2000명이 넘는 중국인들이 집단 투자이민 형식으로 이 일대에 터를 잡은 것.

1910년대에는 그 수가 1만명을 넘어서면서 중국인이 운영하는 음식점과 잡화점 등이 곳곳에 들어서 호황을 누렸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1900년대 초에 개업한 공화춘 송죽루 등 대형 청(淸)요리집은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무역상들로 가득차 밤마다 불야성을 이루는 등 차이나타운의 명물이 됐다.

특히 1920년경에는 인천항 부두노동자를 중심으로 ‘자장면’이 큰 인기를 끌면서 크고 작은 중국음식점이 잇따라 문을 열었다.

4대째 선린동에서 중국음식점 ‘풍미’를 운영하고 있는 한정화씨(57·화교)는 “6·25전까지만 해도 음식점과 각종 상점이 골목을 꽉 메웠을 정도로 활기가 넘쳤다”고 기억했다.

하지만 차이나타운의 명성은 이후 차츰 빛을 잃었다.

전쟁이 끝난 뒤 중국과의 관계가 단절되면서 상당수의 중국인들이 국적을 대만으로 바꿔 돌아가거나 가게를 포기한 채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 것. 자장면 등 중국음식이 일반화되면서 이 지역 음식점들이 경쟁력을 잃은 것도 한 원인이 됐다.

그동안 인천시에서도 차이나타운 개발계획을 여러 차례 발표했지만 제대로 추진되지 않아1980년대에는 음식점 수가 3∼4곳 정도로 줄었고 거주인구도 500여명으로 급감했다.

그러던 것이 최근 인천이 ‘동북아 중심도시 육성 대상지역’으로 급부상함에 따라 차이나타운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고 있다.

인천역 앞 등 두 곳에 특정 지역의 경계를 알려주는 중국식 구조물인‘패루’(牌樓)가 세워졌고 지난달에는 ‘공자상’(孔子像)도 설치됐다.

패루와 공자상은 모두 중구와 우호교류협정을 맺고 있는 중국 웨이하이(威海)시 등에서 기증한 것.

관할 구청인 중구도 지난해부터 내년까지 이 일대 1만여평의 주요 도로를 새로 포장하고 가로등을 설치하는 등 ‘시범거리’로 조성하고 있다. 현재 인천역에서 자유공원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정비가 마무리됐고 중화기독교회∼자유공원을 잇는 70m 남짓한 길에는 벽화도 그려 넣었다.

이런 변화 덕분에 이 곳을 떠났던 음식점들도 속속 돌아와 지금은 10여곳으로 늘었고 풍물상점 등도 하나 둘 새로 들어서고 있다.

중구 개발과 임청환씨는 “최근 중국인을 중심으로 투자문의 사례가 늘고 있다”며 “대형 주차장 등 시설이 확충되면 차이나타운이 새로운 관광명소로서 옛 명성을 되찾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승철기자 parkk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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