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 카드’ 무차별 발급 여전…본보 취재진 점검

  • 입력 2001년 12월 30일 18시 19분


신용카드의 ‘무차별 발급’이 위험 수위를 넘어섰다.

길거리 어디에서나 성업중인 상당수의 신용카드 가판대에서는 제대로 신분도 확인하지 않고 자격이 없는 개인들의 카드 발급 신청을 받아주고 있다.

일부 가판대에서는 신청자와 ‘짜고’ 신청서에 직업과 수입을 조작해 기입하는 편법까지 동원하고 있는 실정이다.

본보 취재진은 최근 서울 시내 주요 거리와 지하철역 등에서 영업중인 신용카드 가판대 수십 곳의 실태를 직접 확인했다.

▽무차별 발급 실태〓24일 오전 서울 지하철 1호선 종각역 부근 S카드 가판대. 대학생으로 소득이 없고 주민등록증도 집에 두고 왔다고 말했지만 카드 발급 신청에 문제될 게 없었다.

30대 중반의 모집인은 “주민등록증 없이도 카드 발급 신청이 충분히 가능하다”며 신청서를 내밀었다. 신청서에 다른 사람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가짜 연락처와 주소를 적는 것으로 신청 절차는 단 5분만에 끝났다.

모집인은 “며칠 뒤 확인전화가 갈텐데 잘 대답해주면 1주일 내에 카드가 우편으로 배달될 것”이라고 말했다.

인근에 있는 B카드 가판대. 대학 졸업 후 취직이 안돼 무일푼이라고 했지만 역시 다른 사람의 주민등록번호와 가짜 주소 및 연락처로 손쉽게 발급 신청이 가능했다.

40대 중반의 모집인은 “직업란에 프리랜서, 부서란에는 사진작가라고 적은 뒤 나중에 본사의 확인 전화에 그대로 답하면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친절하게’ 일러줬다.

서울 종로구 종로3가의 H카드 가판대에서도 수입이 없는 무직자라고 했지만 20대 후반의 여성 모집인의 ‘안내’에 따라 몇분만에 일사천리로 카드 발급 신청을 마칠 수 있었다.

모집인은 “연말을 맞아 직장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카드를 발급하는 특별행사기간”이라고 덧붙였다.

서울 신촌의 K카드 가판대에서는 직업이 없는데도 연소득이 700만원인 프리랜서라고 신청서에 기재하도록 했다.

모집인은 “신용불량자만 아니면 카드 발급에 아무런 제한이 없다”며 “신분증이 없어도 얼마든지 발급 신청을 받는다”고 설명했다.

▽왜 그러나〓은행이나 신용카드사들이 현금서비스나 카드론 등 금리가 높은 카드대출에 매달리면서 너나 없이 신규 카드 발급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이다.

10월 말 현재 국내 신용카드 발급 건수는 총 8100여만장으로 경제인구(15세 이상) 1인당 3.5장 꼴이다. 최근 3개월간 발급된 신용카드만 1280여만장에 이른다.

각종 수당과 인센티브를 노린 카드 가판대 모집인들의 과당 경쟁도 주요인. 현재 카드업계의 가판대 모집인은 5만∼6만여명으로 전체 신규 카드의 50∼70%가 이들에 의해 발급된다. 이들은 대부분 계약직으로 고용돼 신규 카드 1건에 1만∼2만원의 수당을 받는다.

S카드 상담원은 “수당 외에 일정기간 카드 사용액의 0.4∼1%의 인센티브를 받으므로 최대한 발급 실적에 매달린다”며 “금융기관의 심사 절차가 별로 까다롭지 않아 신청받는 물량 대부분이 그대로 발급된다”고 귀띔했다.

▽은행과 신용카드사의 입장〓해당 은행과 신용카드사들은 발급 신청자의 주소와 직장, 은행계좌 등을 엄격하게 확인하고 허위로 밝혀지면 카드 발급을 해주기 않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지나친 경쟁에다 느슨한 심사 과정으로 인해 무분별한 카드 발급이 성행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신용카드 범죄와 신용불량자의 양산을 부추기고 있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실제로 지난달 서울 동대문경찰서에는 다른 사람 명의로 신용카드를 발급받아 수백만원의 현금서비스를 받아 챙긴 사기범들이 붙잡혔다. 올해 발생한 신용카드 위·변조와 관련한 범죄만도 550여건으로 지난해보다 4배 이상 늘었다. 또 9월 말 현재 신용카드 관련 불량자는 95만여명으로 지난해보다 24만명이 늘어났다.

외환은행 관계자는 “최근 금융감독원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현장 가판대에서 본인 여부 및 소득 확인 등이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윤상호기자>ysh100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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