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적세탁/下]외국인 행세 버젓이 재입국

  • 입력 2001년 11월 18일 18시 34분


중국인으로 국적을 세탁한 A씨(40)는 최근 한국에 다녀갔다. 중국인이 한국 비자를 받으려면 까다로운 서류들을 구비해야 하기 때문에 러시아인으로 다시 국적을 세탁한 뒤 한국 비자를 받아냈다.

A씨의 한국행을 도와준 조선족 조직폭력배 J씨는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등에도 신분증 전문 위조단이 있다”며 “러시아에서 신분증을 위조해 여권을 만든 뒤 한국 비자를 받는다”고 말했다.

국적세탁자들이 한국을 오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위조 신분증을 이용해 중국 여권이나 러시아 여권을 발급받아 입국하면 적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한국 여권을 위조하거나 변조해 입국하는 경우도 늘고 있지만 정부의 대책은 없는 상태다. 여권 위조범에 대한 처벌도 약해 관련 범죄는 줄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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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술한 비자 발급 심사〓불법 체류자가 많은 중국인에 대한 비자 발급은 까다로운 편이다. 중국인이 한국 비자를 받으려면 초청장과 호적등본, 주민등록등본, 한국여행 계획서, 왕복 비행기표 사본, 은행잔고증명서, 부동산 보유증명서까지 내야 한다.

이 때문에 국적세탁자들은 비자 발급 심사가 상대적으로 허술한 러시아나 제3국에서 ‘2차 국적세탁’을 하는 경우가 많다.

법무부 입국심사과 관계자는 “국내에 불법체류자가 많은 중국인과는 달리 일부 국가 국민에 대한 비자 발급 절차가 간단한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간단한 여권 위조〓서울지검은 지난달 10일 왕복항공권과 여행경비를 대주고 중국여행을 시켜준 뒤 여행객들에게서 넘겨받은 여권을 위조해 중국인들을 입국시킨 최모씨(41)를 불구속 기소했다. 여행객들은 중국 현지에서 임시여권인 ‘여행자 증명서’를 받아 귀국했지만 이들의 여권은 장당 700만∼800만원에 중국인 브로커들에게 넘어가 불법 입국에 사용됐다.

외교통상부에 따르면 중국에서의 한국인 여행자 증명서 발급 건수는 98년 868건에서 2000년 1696건으로 2배 가량 늘었다. 중국여행을 하는 사람이 늘어난 탓도 있지만 여권 위조와도 무관하지 않다는 게 수사 관계자들의 판단이다.

여권 발급 절차도 문제. 주민등록증과 사진만 제출하면 여행사가 여권 발급을 대행해준다. 그러나 주민등록증이 위변조됐다면 얼마든지 다른 사람이 여권을 만들 수 있다. 서울 종로구청 여권과 관계자는 “다른 사람의 주민등록증에 자신의 사진을 위조해 넣은 경우 가려낼 방법이 없다”고 털어놨다.

▽기소중지자의 자유로운 입출국〓수사기관은 기소중지자라도 출국이 금지되지 않았으면 출국을 허용하고 있다. 법무부 출입국관리과 관계자는 “10만명이 넘는 기소중지자의 출국을 모두 금지하면 동명이인을 비롯해 많은 사람이 공항 이용에 불편을 겪는다”며 “지나친 출국금지는 인권침해 소지도 있어 바람직하지 않다”고 밝혔다.

그러나 기소중지자가 해외에서 ‘제2의 범죄’를 저지르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죄질과 범죄 경력에 따라 출국에 제한을 두는 방안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건국대 양필승(梁必承) 교수는 “국적세탁은 범죄 세계의 세계화보다 수사 당국의 세계화가 더 늦어 생기는 일”이라며 “한국과 중국 사법당국간 협조 체제 강화와 허술한 출입국 관리를 보완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호원·민동용기자·옌타이〓이훈기자>dreamland@donga.com

▼솜방망이 위조범 처벌▼

여권 위조 혐의로 4월 구속됐던 김모씨(45)는 6개월만에 집행유예로 풀려나 자신을 검거한 서울의 한 경찰서를 ‘인사차’ 찾아갔다. 그를 만난 담당 경찰관은 “위조 기술자가 아니면 대부분 이렇게 풀려난다”며 허탈해 했다.

형법 225조는 여권 위조범에 대해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실제로 위조범이 받는 형량은 1∼2년에 불과하다.

검찰 관계자는 “여권 위조를 수십건 했어도 이를 모두 입증하기가 어려워 선고 형량이 낮아질 수밖에 없다”며 “위조범들이 검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고 설명했다.

서울조선족교회 서경석(徐京錫) 목사는 “중국은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신분증이나 여권을 위조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한국의 출입국 관리 시스템을 보다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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