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돌좌담]'파괴냐 해방이냐'1화

  • 입력 2001년 1월 27일 14시 36분


페미니즘은 여권 향상과 여성의 자아 찾기를 통한 여성해방을 목표로 삼고 있다. 한국의 페미니즘 운동은 그동안 부당한 성차별에 대항해 여성 권익을 키우고 사회 곳곳에 배어 있는 남성지배이데올로기를 약화하는 등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많은 남성들은 피해의식을 느끼고 마뜩치 않게 여기는 것 또한 현실이다. 비판론자들은 페미니즘이 남성 공격에 초점을 맞춘 나머지 모성 파괴, 이혼 조장, 가정 붕괴, 공동체 의식 해체 등 전통사회의 미덕을 해치는 결과를 낳았다고 주장한다.

페미니즘은 파괴인가, 해방인가. ‘신동아’ 좌담은 호주제 폐지, 성희롱 문제 등 다양한 이슈에 대한 논쟁으로 페미니즘 운동의 참뜻을 짚어보고, 이 운동이 남녀 모두에게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이바지할 목적으로 마련됐다.

사회 : 21세기를 ‘여성의 시대’라고 하는데 여기에 사회적·역사적 타당성이 있는지를 토론 출발점으로 삼죠.

민용태 : 여성의 시대는 민주주의 발전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여성성이 도드라지기 시작한 시기를 다소 과장해 여성상위시대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여성의 시대란 남녀 평등이라는 사고가 일반화되는 시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21세기는 여성의 시대로 불릴 만한 역사적 당위성을 갖고 있습니다.

남윤인순 : ‘21세기는 정보화 사회이기 때문에 근력을 중심으로 한 노동에도 변화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변화된 산업구조에서 여성의 특징이 더 발휘될 것이다’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습니다. 또 한가지 21세기의 특징으로 보통 ‘3F’, 즉 여성(female), 픽션(fiction), 감성(feeling)을 꼽았어요. 이 세 가지는 별개라기보다는 서로 관련돼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90년대부터 여성의 시대가 도래한다는 얘기를 해왔어요. 여성의 시대가 되려면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이 바뀌고 여성의 능력계발을 지원하는 조치가 따라야 하는데 아직은 지식기반사회에 들어온 여성 비율이 엄청나게 낮은 상황이죠.

민용태 : 남성이 정보를 쥐고 있는 사회에서 여성 차별이 해소되지 않았다는 지적엔 일리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중·고등학교까지 암기식 교육으로 일관하고 있는데, 그것도 남성 문화의 영향력이라고 볼 수 있겠죠.

김신명숙 : 여성의 세기를, 남성들은 기존 남성지배구조가 여성지배구조로 바뀐다고 오해하는 것 같아요. 여성의 세기는 여성이 자기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면서 남성과 동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뜻해요. 최근 ‘제1의 성’이라는 책을 봤는데, 디지털 경제에서는 모든 게 다 바뀐다는 겁니다.

기업 경영구조도 유연해지고 팀플레이가 중요해지는데 이런 일엔 여성의 성향이 더 적합하다는 거죠. 저는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살아가는 쪽으로 세상이 바뀌리라고 믿지만 한국 사회가 그렇게 되기엔 아직 해결해야 할 숙제가 많다고 봅니다. 여성 스스로의 자각은 물론 남성의 각성이 필요하죠.

신승철 : 한국 여성운동이 발전한 데는 미국에서 공부한 일부 여성학자의 공이 크다고 봅니다. 성희롱 방지, 여성 고용 등에서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일부 여성 운동가에겐 문제가 있어요. 예를 들어, 성희롱 예방 방지법을 보면 1980년대 초 미국에서 만든 섹슈얼 허레스먼트(성희롱) 규정을 똑같이 베낀 겁니다. 한국 실정에 맞춰 고민하고 소화한 게 아니라 그냥 베낀 거예요. 사회적 논의 과정 없이 갑자기 그런 게 생기니까 남성들이 당황한 거죠. 의식을 바꾸는 것이 쉽지 않거든요.

민용태 : 한국 남자의 고뇌와 한국 문화와의 갈등을 짚어보는 게 옳습니다. 미국의 섹슈얼 허레스먼트 규정을 그대로 번역해 적용한 것처럼 해방 이후 하루 아침에 일부일처제가 법제화되고 간통죄가 생겼어요. 남성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문제에 사회적으로 합의하는 과정을 전혀 거치지 않았어요.

김신명숙 : 섹슈얼 허레스먼트를 미국에서 그대로 옮겨왔기 때문에 한국 남자들이 힘들다고 하는데, 사실 미국 남자들도 엄청난 갈등을 겪었습니다. 갑자기 여자들이 권리를 주장하고 나서니 당혹스러웠던 거지요. 강하게 반발하는 사람도 있었구요. 예를 들어 캐나다에서는 페미니즘에 열 받은 남자가 여대생 14명을 총으로 쏴 죽였단 말이죠. ‘너희들이 여권운동을 해 나라 망친다’면서….

▼한국 남성의 ‘위기’▼

신승철 : 직장내 성희롱은 남자들이 여자 심리를 잘 몰라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아요. 싫어하는데도 자꾸 집적거린단 말이에요. 자꾸 접근하다 보면 여자도 좋아하지 않을까, 또는 창피하니까 어디 가서 얘기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사실 여자 생각은 다릅니다. 나는 페미니즘 운동 이전에 남녀간 생리적이고 심리적인 차이를 이해하는 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민용태 : 한국 남성이 여성을 대하는 태도는 위기에 이르렀다고 봅니다. 대단히 잘못돼 있어요. 동반자 관계가 아니라, 남존여비까지는 아니더라도 비슷한 잠재의식이 있어요. 그런 의식이 현실에 나타나는 것이 바로 관료주의와 권위주의입니다. 관료 지위를 이용해 (여성을) 만질 수 있다거나, 내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거나, 커피를 시킬 수 있다고 보는 전근대적 사고가 있어요. 그래서 위기라는 겁니다.

신승철 : 지난번 한 대학의 문과대 교수가 술자리에서 여학생에게 뽀뽀를 했어요. 예쁜 학생이었나 봐요. 뺨에 뽀뽀를 했는데 당사자는 문제삼지 않았는데 옆에서 본 친구가 대자보를 낸 거야. ‘모교수가 X 같은 짓을 했다’고. 그것이 비화돼 학생들이 ‘물러나라’고 외치게 됐어요. 그렇게 되니 당사자도 자의반 타의반으로 거기에 휘말리게 된 거예요. 자기가 빠지면 나중에 이상한 여자가 되거든. 술자리 분위기라는 게 있고 관용으로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인데….

남윤인순 : 악용하는 경우도 있겠죠. 저는 현 단계에서는 의식 변화와 교육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정말 남자와 여자가 의사소통하는 방법을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얼마 전 제가 독일에서 열린 ‘민주시민교육’이라는 행사에 다녀왔는데, 교육 과목에 ‘남자와 여자가 의사소통하는 방법’이라는 게 있더라구요. 우리는 가부장적 가족제도에서 살면서 전혀 그런 훈련을 받지 않았어요. 우리 사회가 압축성장을 하다보니 역효과가 많아요.

민용태 : 미국식 페미니즘은 마르크시즘적 발상이자 이데올로기적 발상입니다. 인간해방운동의 일환으로서 여성 해방이 나오죠. 그런 식의 페미니즘이 갖는 병폐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사실 민주주의나 여성운동이 원하는 것은 남자와 여자의 참된 대화이고 화해지 반남성적이라든가 반사회적인 것은 아니거든요.

김신명숙 : ‘미국과 한국은 다르다. 미국 페미니즘을 그대로 갖다가 한국에 적용하니까 문제가 생긴다’고 하는데, 여성 문제에 대한 시각에는 동서간 차이가 없다고 봅니다. 똑같거든요. 가부장제, 성희롱, 여성관…. 여성 문제에 대해 남성들과 얘기할 때마다 항상 느끼는 것이 시각이 너무나 다르다는 거죠. 아주 재미있어요. 이번에 동아일보에도 보도됐습니다만, 성희롱 감독관 배치에 대해 네티즌 여론조사를 했더니 반대가 더 많았어요. 그런 곳에 의견을 내놓는 사람 중엔 남자들이 더 많거든요.

민용태 : 감독관이 없으면 안된다고 말씀하는데, 중매쟁이가 없으면 결혼을 못한다는 겁니까?

김신명숙 : 결혼과는 달라요. 교수나 직장 상사한테 항의하는 것이 쉽지 않지요.

민용태 : 교수가 학생을 사랑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다만 접근하는 매너가 공감대를 얻지 못했다면, 그것은 구애 실패라고 봐야죠. 그렇지 않겠습니까?

김신명숙 : 그건 다른 얘기죠.

민용태 : 구애하는데 실패했다는 걸 감안하라는 겁니다.

김신명숙 : 구애한다면서 어떻게 뽀뽀부터 하고 신체 접촉을 합니까.

민용태 : 남자의 구애 형태가 서툴렀을 뿐입니다.

김신명숙 : 서투른 게 아니라 그게 불법인데….

민용태 : 교수에 앞서 사람입니다. 감정의 자연스러운 노출을 법으로 제한하려는 발상이 유치하다는 거죠. 이 남자가 지위를 이용하려 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생각해야 합니다.

김신명숙 : 남자들은 성희롱 예방법규에 대해 그것이 도대체 왜 생겼고 여자들이 왜 그것을 주장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보기보다는 ‘잘못 이용되지 않을까’ 하는 거부감부터 느끼는 것 같습니다. ‘뭐 그런 걸 가지고 그러냐?’ 그런 것들이 다 허용됐던 사회에서….

▼남녀의 차이를 이해해야▼

신승철 : 남자들이 사랑하는 심리하고 여자들이 사랑을 바라는 방식은 다르다고 봐요.

김신명숙 : 아까 말씀하신 교수가 제자를 사랑해서 그랬겠어요?

신승철 : 그건 아니죠. 반 장난이죠. 어쨌든 성희롱법은 누군가를 구제하기 위해 만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면 그 사건에 관련된 두 여학생 다 학교를 못 다녀요. 이게 뭐예요? 성희롱법이 잘못 됐다는 것이 아니라 상호 소통 방식이 잘못됐다는 겁니다. 남자들은 대부분 사랑할 때 섹스를 원하지만 여자들은 다르거든요. 먼저 감정교류가 이뤄져야 하는데 남자들은 그걸 몰라요.

남윤인순 : 성적 결정권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방법을 바꿔야죠. ‘한국 남성은 그렇게 살아왔다, 그걸 이해해달라’가 아니라 잘못된 생각을 바꿔야 하지 않겠어요?

신승철 : 본질적인 차이를 이해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합니다.

민용태 : 한국의 남성 교육이 문제입니다. 한국 남성은 우월주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어요. 남성을 문화화하는 선결과제는 여자와의 말 트기라고 봐요. 그런 면에서 대화 관계를 끌어내는 교육이 필요하죠.

신승철 : 나는 여성운동이 상당히 긍정적인 효과를 거둘 것으로 봐요. 가정폭력 등 여성이 피해를 입거나 희생당하는 문제를 개선하는 효과가 있을 거예요. 하지만 여성운동을 통해 과연 한국 여성 지위가 얼마나 올라갈지는 낙관할 수 없어요. 우리나라 술집 접대부가 얼마나 되는지 아시죠? 몇 백만이에요. 강남에 가면 둘 중 하나는 유흥업소에 종사하는 여자입니다. 사회 참여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향락문화에 빠져서….

김신명숙 : 도대체 그 여자들이 그런 일을 하도록 만드는 남자들은 다 어디에 있는 거예요? 한국 여자가 모자라서 러시아, 태국, 필리핀 여자까지 데려오는데 도대체 그 남자들, 어디에 있는 거예요. 나는 늘 그게 궁금해요.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요.

신승철 : 나도 포함돼 있어요. 술 좋아하고 여자 좋아하니까. 그런데 그런 문제는 이데올로기와 법으로 해결하기 힘들어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의 성을 상품화한다 어쩐다 그러는데 성이 상품화되는 게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남윤인순 : 성을 사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파는 사람도 생기는 거죠. 자발적으로 좋아서 성을 파는 게 아니잖아요.

신승철 : 가정 주부들이 노래방에 가서 3만 원 팁 받고, 5만 원 주면 나가고….

남윤인순 : 성을 사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그런 거잖아요.

신승철 : 한쪽으로만 보면 안된다니까요.

민용태 : 성이나 돈을 마음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성희롱 문제를 돈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강하죠. 여자에게 돈을 제대로 주지 않아 고소·고발당하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김신명숙 : 돈에 의한 차별이야 곳곳에 널려 있잖아요.

민용태 : 지위를 올려주지 않았거나 돈을 충분히 주지 않았기 때문에, 화간에 가까운데도 고발당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문제죠.

김신명숙 : 그것은 부작용이잖아요. 부작용 없는 처방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어떤 약도 다 부작용이 있잖아요.

민용태 : 부작용이 훨씬 무섭습니다. 나도 술 좋아하고 여자 좋아하는 점에서 공범인데요. 실제 사건은 주관적인 겁니다. 마음으로는 서로 좋아서 만지고 사랑했을 수도 있습니다.

김신명숙 : 그런 경우라면 성희롱으로 고발되겠어요? 안되죠.

민용태 : 아니죠. 뒤에 생각해보니까, 남자가 나쁘단 말이죠. 그럴 때 고발한다는 겁니다.

김신명숙 : 글쎄 그 경우라면 한국에서는 절대로 처벌을 받지 않을걸요. 화간을 무슨 증거로?

민용태 : 좋아서 했다는 근거를 만들 수 있습니까? 그건 은밀한 관계인데요.

김신명숙 : 아마 어려울 겁니다. 그보다 훨씬 입증하기 쉬운 강간 사건도 법정에서 인정되는 비율은 2% 안팎이라고 하던데.

민용태 : 아니죠. 교수나 장군은 명예에 대한 처벌이 더 무겁죠. 소문이 난 것 자체가 엄청난 처벌입니다. 게다가 그 문제로 법원까지 간다면 유·무죄를 떠나 교수나 장군으로서 생명은 끝난 겁니다.

김신명숙 : 성희롱법이 만들어지기 전에도 그런 스캔들을 일으킨 사람은 명예가 엄청나게 훼손됐어요. 그러니까 그런 것과 성희롱 법제화는 상관없는 일이죠.

민용태 : 그렇지 않죠. 사랑은 대화 관계입니다. 그런데 성희롱 법규 제정으로 그것을 다른 쪽으로 이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 겁니다. 그러면 앞으로 어떤 여자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불신의 시대가 오겠죠.

남윤인순 : 인간관계를 서먹하게 만드는 역효과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제도 자체가 문제라고 볼 수는 없죠.

민용태 : 교수가 제자와 함께 술을 먹었어요. 술을 먹으면서 성희롱적 욕망이 아니라 사랑의 감정이 생길 수도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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