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신금 불법대출]청와대 8급 청소부 "뭐든지 부탁만 해라"

  • 입력 2000년 11월 10일 18시 41분


《‘현대판 경무대 X통 사건?’이승만(李承晩)정권 시절에는 ‘경무대(현 청와대)에서 일하면 화장실 인분처리원도 위세를 부린다’는 말이 있었다. 또 이를 풍자한 당시 동아일보의 ‘고바우’만화로 화백이 고초를 겪기도 했다. 반세기 뒤에 발생한 동방금고 불법대출 사건에서도 유사한 일이 벌어졌다. ‘청와대 청소원’인 이윤규씨(36)가 한국디지탈라인 정현준(鄭炫埈)사장에게서 주식투자 손실보전금 등으로 3억9830만원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 청와대는 자체 조사 결과 이씨가 모두 8억여원을 전달받았다고 밝혔다.》

▼ 어떤 사이인가 ▼

이씨는 노태우(盧泰愚)정권 시절인 89년 청와대에 들어가 9일까지 청와대내 이곳 저곳의 청소업무를 담당했던 총무수석비서관실 8급 위생직원이었다.

검찰 수사결과 이씨는 정사장에게 자신이 ‘청와대 총무수석실 과장’이라고 사칭하며 돈을 챙긴 것으로 드러났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98년. 이씨는 친구의 소개로 정사장를 만나 자신을 청와대 과장이라고 소개하고 “청와대에서만 10년을 일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성심껏 도와 줄 테니 부탁하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사장은 최근까지도 이씨를 청와대 과장으로 알고 극진히 대접하며 관계를 맺어왔으며 국회 정무위의 국정감사에서도 “검찰 출두 전에도 ‘이과장’과 상의했다”고 증언했었다.

극진한 대접에는 돈과 주식이 따랐다. 청와대 관계자에 따르면 이씨는 지난해 정사장의 투자 권유를 받자 친척 5, 6명의 돈을 끌어모아 평창정보통신과 N사 등 장외시장의 주식에 7억5000만원을 투자했다는 것.

그러나 올 들어 코스닥 시장이 폭락해 이씨가 투자금을 날리게 되자 정사장은 투자원금을 현금으로 돌려준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이 영장에 기재한 손실보전금 2억8000만원은 이씨가 값이 떨어진 주식을 정사장에게 되돌려 주고 투자원금을 받으면서 얻은 이익으로 보인다.

▼ 무슨일 했을까 ▼

정사장은 이씨에게 술값으로 730만원, 생활비로 1000만원, 용돈으로 2700만원, 주택구입비로 6500만원, 가구구입비로 900만원을 지급했다고 검찰은 밝혔다. 그 대가는 경찰청 특수대와 금감원에 대한 청탁.

검찰 관계자는 “이씨가 전혀 로비할 능력이 없는데도 능력이 있는 것처럼 속였고 실제로 전화까지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결국 이씨의 등장으로 그동안 정사장이 자신의 사업과 관련해 ‘정관계 로비’를 시도했다는 것은 일부 사실로 확인된 셈. 이씨는 ‘빙산의 일각’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검찰은 특히 ‘단순 사칭극’이라고 보기에는 오고 간 돈이 너무 많다는 점에서 정사장이 왜 이씨를 믿게 됐는지, 이씨가 ‘정관계 로비’에 일부 역할을 했는지도 조사 중이다.

이에 대해 청와대측은 “청와대 직원이 코스닥열풍에 바람이 들어 사칭을 하고 투자를 한 것”이라며 “이씨가 뇌물을 받았다거나 로비를 해 주었다면 소도 웃을 일”이라고 주장했다.

청와대는 3일 정사장이 관리한 인맥 441명의 명단이 언론에 보도되자 추적작업을 벌여 이씨를 찾아내 자체 조사를 한 뒤 9일 오후 이씨의 신병을 검찰에 넘겼다.

이씨는 구속되면서 “죄송하다. 탄로날 줄 알았다”고 말했다. 이씨는 그러나 자신 외에 정사장의 주식에 투자한 청와대 직원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없다”고 말했다.

<신석호기자> kyle@donga.com

▼野 "실세는 얼마나…"…與 "실세 무관 증명"▼

한나라당은 10일 청와대 청소 담당 직원이 정현준(鄭炫埈)한국디지탈라인 사장으로부터 거액을 받은 것과 관련해 특검제 도입 필요성을 재차 주장하는 등 공세를 강화했다.

권철현(權哲賢)대변인은 논평을 내고 “청와대 8급 위생담당 직원이 정현준사장과 수시로 전화 통화하며 민원을 해결해 준 대가가 이 정도라면 정권 실세와 상위직과는 천문학적 거래가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권대변인은 “권력의 최상부인 청와대가 썩어 내리고 있는데도 청와대는 이 사건을 ‘단순 사기극’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민주당 이명식(李明植)부대변인은 “정현준씨가 이 정권에 단 한명이라도 가까운 사람이 있었다면 청와대 청소하던 사람에게 사기를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이는 동방금고 사건이 이 정권 실세와는 무관함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공종식기자>k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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