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집단폐업 전날 스케치]"마지막 진료" 북새통

  • 입력 2000년 6월 19일 20시 51분


의료대란 환자들의 피해사례
의료대란 환자들의 피해사례
《병의원의 집단폐업을 하루 앞둔 19일 국공립병원 소속의 인턴 레지던트 등 전공의들까지 잇따라 진료거부를 결의하는 등 파업에 나서 이들 병원도 진료 마비를 피할 수 없게 됐다. 이에 따라 일반 병원이 폐업과 파업에 들어가면 전국의 국공립병원을 24시간 풀가동하는 비상진료를 편다는 당초의 정부 계획은 큰 차질을 빚을 것으로 보인다. 이날 전국 대학병원과 종합병원, 대형약국 등에는 앞당겨 진료를 받으려는 사람들과 장기복용약을 구입하기 위한 환자들이 평소보다 2배 정도나 몰려 북새통을 이루었다.》

▼'전문의 만으론 태부족"▼

○…현재 서울지역의 국공립병원 14곳 가운데 전공의들이 진료거부 방침을 굳힌 곳은 서울대병원 국립경찰병원 한국보훈병원 서울적십자병원 등 4곳. 나머지 병원들도 전국 전공의협의회의 결정에 따라 폐업에 참여한다는 입장이다.

서울적십자병원의 전공의협의회는 이날 오전 10시 대책회의를 갖고 당초의 폐업 불참 입장을 바꿔 진료거부를 결의했다.

이에 따라 병원측은 72명의 전공의를 제외한 40여명의 전문의 인력만으로 폐업기간 중 몰려드는 환자들을 진료해야 하는 상황. 병원 관계자는 “전공의들이 빠진 상황에서 가능한 수술은 30%수준에 불과하다”며 “이 인력으로는 일주일 이상 정상적인 진료를 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전체 의료진 210명 가운데 130여명인 전공의가 진료거부 결정을 내린 국립보건원도 70여명 내외의 전문의를 총동원해 비상진료체제에 나선다는 계획이지만 며칠 안에 병원가동률이 50% 미만으로 떨어질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병원 관계자는 “이 인력으로는 응급수술을 제외한 나머지 수술은 도저히 할 수가 없는 실정”이라고 밝혔다.

▼"병원서 이럴수가…▼

○…전국의 주요 대학병원과 종합병원에서는 이날 평소보다 2, 3배나 되는 환자가 몰려 저녁 늦게까지 진료활동을 벌였다.

평소 6000∼7000여명의 환자가 찾는 연세대 신촌세브란스병원 외래에서는 이날 1만여명의 환자가 몰렸고 서울중앙병원도 평소 6000명인 외래 및 응급실 환자가 1만명을 넘었다.

세브란스병원을 찾은 직장인 오모씨(40)는 “최근 교직을 은퇴한 아버지가 속이 아프다고 해 며칠 전 내시경 검사를 받았는데 위암 소견이 나왔다”면서 “구체적인 위암 진척도를 알아보려면 수술을 해야 하지만 1000여명의 대기 환자가 있는데다 폐업까지 겹쳐 언제 수술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는 “만약 아버지가 제때 수술을 받지 못해 잘못될 경우 의사들은 우리 집안의 원수가 될 것”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평소보다 환자가 700∼800명 늘어난 4500여명이 몰린 서울 여의도 가톨릭성모병원 민원실에는 “분만 예정일이 다가왔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 “내일 당장 수술 날짜를 잡아 달라”는 등의 문의 및 예약 전화로 업무가 마비될 지경.

서울대병원을 찾은 김모씨(45)는 “동네 병원에서 상태가 급박하다고 추천서를 써주어 정확한 진단을 받으러 병원에 왔는데 예약날짜를 8월말로 잡아주었다”며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병원에서 이래도 되는 거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당뇨병과 심장협착증 등으로 광주 전남대병원에 입원중인 김수금씨(66·여·광주 광산구)는 “10여일 동안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며 수술할 날만 고대했는데 이제 와서 나라가고 하면 어떻게 하느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오후 8시반 서울 강남성모병원 1층 로비 외래약국. 평상시 같으면 이미 불이 꺼져 있을 시간이지만 100여명이 약을 타기 위해 지친 표정으로 소파에 기대앉아 웅성거리고 있었다.

평소 환자가 4000명 정도였는데 이날 6500여명이 몰려오는 바람에 미처 약을 타지 못한 사람들이 늦은 시간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미 1000여명은 다음날 약을 받기로 하고 돌아갔고 200여명은 기다리다 못해 병원내 택배회사에 약 배달을 부탁하고 돌아갔다.

○…대형 약국이 몰려 있는 서울 종로5가에는 고혈압 당뇨병 심장병 등의 약을 장기간 복용하고 있는 환자들이 약국을 찾아 수개월 내지 1년치씩 약을 사가는 모습도 보였다.

보령약국 김지훈약사(32)는 “평소 하루 고객이 3000여명인데 지난 주말부터 4000여명으로 늘었다”며 “한 두 달치 약을 사가는 사람은 물론이고 유효기간을 확인한 뒤 1년치를 사가는 사람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교수가 "폐업반대" 글 올려▼

○…의료계의 집단폐업속에 한양대 의과대 예방의학과 신영전교수가 이 대학 홈페이지에 전공의들에게 보내는 폐업반대의 글을 올려 화제.

신교수는 “만약 여러분의 진료거부로 단 한사람이라도 죽는다면 당신들은 이미 싸움에 진 것”이라고 주장.

그는 “이미 한 이익집단의 싸움을 넘어선 이 싸움에서 이기는 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국민의 입장에 서는 것”이라며 “의사들의 진정한 권력은 지식이나 집단적 단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환자들에 대한 한없는 애정과 헌신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 동대문구 답십리동에서 20년 넘게 약국을 해온 K씨(50·여)는 “의약분업이 실시되면 손해를 보는 것은 결국 약사”라면서 “그동안 의약분업에 대비해 투자한 돈만 수천만원인데 의사들이 합의 사항을 일방적으로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흥분했다.

<이슈부·지방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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