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추기경에 듣는다]"南北정상회담전에 여야협력 우선"

  • 입력 2000년 4월 14일 23시 30분


《‘민의의 잔치’는 일단 끝났다. 이제 16대 총선 과정에서의 갈등과 반목이 있었다면 모두 묻어 버리고 희망과 화합을 이야기할 때다. ‘우리 시대의 어른’으로 나라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마다 낮고 올곧은 목소리로 시대와 민족의 갈길을 제시해 온 김수환(金壽煥·78)추기경. 14일 오후 서울 혜화동 추기경 집무실을 찾아 우리가 나아가야 할 ‘큰 길’이 무엇인지 여쭤 보았다. 책상과 소파 외에 별다른 장식물이 없는 추기경 집무실은 기자 4명이 들어가자 꽉 차버렸다. 74년 명동성당 출입기자로 지학순주교의 ‘양심선언’ 등을 취재 보도한 바 있는 동아일보 박기정(朴紀正) 편집국장이 당시를 떠올리며 인사를 건네자 김추기경은 환한 미소로 맞으며 자리를 권했다. 14일 새벽 1시까지 TV를 통해 개표결과를 지켜봤다는 김추기경은 “관심을 가진 몇몇 후보들이 엎치락뒤치락해 쉽사리 잠을 이룰 수 없었다”며 웃음을 지었다.》

―삼청터널을 지나오다 보니 봄꽃이 화창하더군요. 그러나 선거를 치르고 난 후의 마음은 갑갑하기만 합니다. 이번 선거는 어느 때보다도 정치인들이 지역갈등을 부추긴 형국이었습니다. 이제 갈가리 조각난 감정을 바로잡아야 할 때인 것 같은데요.

"지역감정이 극복돼야 한다는 데는 국민 누구나 동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선거가 닥치면 망령처럼 되살아납니다. 제 생각엔 이번 선거를 앞두고 불과 3일 전에 남북회담 성사를 발표한 것이 오히려 유권자들에게 ‘이대로 있다가는 안되겠다’는 심리를 부추긴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일례로 민국당이 몇석이라도 차지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부산 경남지역을 한나라당이 싹쓸이하는 것을 보면서 예전 부산의 초원복집 사건이 떠올랐어요. 여당에 악재인 사건이 오히려 ‘상대편에게 질 수 없다’는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켜 몰표가 나왔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모두가 한번 더 깊이 ‘과연 우리가 이래서야 되겠느냐’는 반성을 해야한다고 봅니다. 세계가 하나로 묶여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시대에 우리 자신이 이렇게 동서화합도, 여야협력도 이루지 못해서야 어떻게 남북관계 개선이나 평화통일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정치는 조화, 화합을 지향하는 종합예술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는 여전히 적과 적의 대립 개념일 뿐입니다. 왜 지금껏 이런 대결구도가 시정되지 않는 걸까요.

“내가 살기 위해선 네가 죽어야한다는 그릇된 생각 때문이지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함께 살아갈 줄 아는 공생(共生)과 상생(相生)의 지혜입니다.”

얼마전 서영훈 민주당대표가 방문했을 때 ‘김대중대통령이 이번 선거에서 집권 여당이 안정의석을 얻어야겠다는 집념이 너무 크신 것 같더라. 그래서는 오히려 표를 잃을 염려가 있다’고 얘기한 일이 있습니다. 대통령께서 이번 선거를 ‘공정선거 원년으로 삼겠다’고 천명하셨는데 초연한 입장에서 그렇게 하셨더라면 국민도 공감하고 자연히 표로도 연결됐을텐데요….”

―이번 선거에서는 낙선운동을 벌인 시민단체가 유권자에게 준 영향력은 상당했습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어떠신지요?

“시민단체가 참여한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선거법을 일부 어기면서까지 낙천 낙선운동을 벌인 데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너도나도 시민단체의 이름을 내걸고 자기 당과 후보를 위해 운동을 벌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애초 낙천 낙선운동의 취지와는 달리 선거가 갈수록 혼탁해질 수도 있어요.”

―이번 선거 결과 이른바 386세대 등 젊은 세대들이 대거 정치권에 새로 영입됐습니다. 이들에 대해 추기경님께서는 어떤 기대를 갖고 계십니까?

"무엇보다도 돈 안 쓰는 깨끗한 정치풍토를 이분들이 정착시켜 주길 기대합니다. 이번에도 ‘30당20락’(30當20落·30억원 쓰면 붙고 20억원 쓰면 떨어진다)같은 말들이 돌았는데 도대체 그 돈이 다 어디서 나옵니까. 깨끗한 정치를 하겠다고 나선 국회의원들조차 선거구 관리비용이 한달 평균 최소한 2000만원이상이 든다고 털어놓더군요. 세비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비용입니다. 그러니 결국 정치인들이 금전적인 문제로 타락하게 되고 정치인의 타락은 필연적으로 공직사회의 부패를 불러오게 되는 것 아닙니까. 싱가포르는 자기네 나라의 세가지 깨끗한 것으로 공기와 물, 공직사회를 자랑한다고 하지요? 제 아무리 좋은 자동차를 만들어내고 선박을 만들어내도 정신적으로 자랑할 것이 없는 나라는 후진국입니다.”

―여당과 접전을 치러 제1당이 된 야당에 대해서도 추기경께서 당부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을 것 같은데요.

“어떤 의미로는 유권자인 국민의 심판이 현명했다고 봅니다. 우선 여당은 제1당은 못됐지만 서울 강원 충청권에서 의석을 확보해 안정구도도 갖추고 호남당에서 전국당으로 발돋움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러면서도 국민은 균형과 견제를 이룰 수 있도록 야당이 제1당이 되도록 했죠. 이런 결과에 대해 여야는 자기편에만 유리하게 해석하거나 다음 대통령선거와 연계해 정략적 분석만 할 게 아니라 ‘협력할 것은 협력하고, 건설적으로 비판’하는 자세를 보여줘야 합니다. 밤낮 싸우는 모습만 보여줄 게 아니라 정말 ‘국민을 안심시키는 정치’를 해야 합니다. 특히 앞으로 있을 남북정상회담은 나라의 운명이 걸린 일인만큼 여야가 뜻과 지혜를 모아 대처해야 합니다.”

―선거 3일전 남북정상회담 발표가 있었지요. 그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여당이 그로 인해 얼마나 표를 얻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남북정상회담 자체의 의의는 훼손시키는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왜 여야가 일치될 수 있고, 일치해야만 하는 재료를 가지고 오히려 분열을 불러일으켰는지….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앞으로는 달라져야 합니다. 남북회담은 우리나라의 운명과 직결돼 있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 만남입니다. 설령 얼마의 대가를 줬더라도 남북의 최고지도자가 한번 만나기로 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일단 만나야 두 번, 세 번 대화가 이어질 수 있으니까요. 사실 북쪽은 이 세상에서 제일 대화하기 힘든 상대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합의했다고 하지만 예비회담 과정에서 언제 회담이 깨질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미 베를린 선언에서 많은 것을 약속했습니다. 심각한 식량부족으로 이미 많은 사람이 희생됐고, 전력난 등 사회기반 시설이 태부족한 북한을 경제도탄에서 구하겠다고, 즉 엄청나게 돈이 드는 일을 하겠다고 제안한 겁니다. 지금 북한의 자세는 남한이 주겠다고 하는데 우리가 안 받을 이유가 뭐냐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남북정상회담을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정치권과 국민에게 해주실 말씀이 있을 법한데요.

“자칫 잘못하면 회담 내내 북한에 끌려다닐 수도 있습니다. 물론 ‘상호주의 원칙’에 너무 집착하게 되면 회담이 결렬될 우려가 있다는 의견도 존중해야죠. 그러나 우리가 주는 만큼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내야 합니다. 북한으로부터 우리가 받을 것은 어떤 물건이 아니라 대외개방이라든지, 남북긴장완화, 이산가족 상봉 등의 태도변화입니다. 도와줄 것은 도와주지만 북한도 거절하지 못하는 한민족으로서의 요구는 당당하게 해야합니다. 그러나 남북정상회담이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남한의 여야 정치지도자들과 정치 세력들이 먼저 하나가 돼야합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야당 당수시절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는 김영삼대통령에게 ‘김일성주석은 만나면서, 왜 남한의 정치동반자인 야당 당수는 만나지 않느냐’는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는 이 기억을 지금 김대통령께 상기시켜드리고 싶습니다. 김대통령이 김정일국방위원장을 만나기에 앞서 야당당수를 만나 의견을 듣고, 야당의 협조를 구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국민도 소외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세금을 북한에 보내는 일이고, 민족의 운명이 걸린 문제인데 국민으로부터도 적극적인 동의를 얻어내야 합니다.

김대통령과 여당은 대야 대국민 관계에 좀더 성의를 갖고 하나가 되도록 노력해야합니다. 북한도 남한측이 분열된 상태에서 회담장에 오는지, 하나인 상태에서 오는지 알고 있을 겁니다. 여야 정치권, 국민이 모두 하나가 된 힘을 가지고 남북정상이 만나야 한마디를 해도 힘이 있게 될 것입니다.”

―추기경께서는 서울대교구장 재임중에 평양교구장서리를 겸임하면서 방북의사를 밝히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남북정상회담이 예정된 지금도 방북의 소망은 변함없으신지요.

"물론 지금이라도 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북한측의 변화도 있어야겠지요. 그간 북에 다녀온 사람들이 ‘김수환추기경은 7번이나 초청했는데 안 오시더라’는 말을 북한측에서 하더라고 여러번 말하더군요. 그때마다 저는 말로만 그러지 말고 서면으로 초청장을 보내달라, 그러면 제가 정부에 말해 추진해보겠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김영삼대통령 시절 남북정상회담은 미국의 카터 전대통령이 중간에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엔 어떤 제3국의 인물이 아니라 우리끼리 직접 합의했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습니다. ‘남북합의서’나 ‘베를린선언’을 통해 이미 남한은 ‘흡수통일’이나 북한의 체제를 무너뜨리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라는 뜻을 분명히 했습니다. 순수하게 함께 같이 살자는 우리의 ‘순정(純情)’을 북한의 집권세력들이 이제 받아들여야 합니다.”

―화제를 조금 돌려보겠습니다. 추기경님께서 개설하신 컴퓨터 홈페이지가 아주 인기라고 들었는데요.

"예 그런데 아쉽게도 얼마전 대화방을 닫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손목과무릎에 퇴행성 관절염이 생겼는데, 의사가 컴퓨터 자판을 절대로 사용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어요. E메일만 보면 당장 답장을 하고 싶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대화방을 닫아버렸습니다. 건강이 회복되면 컴퓨터를 다시 켜고 싶은데, 언제 다시 열 수 있을지…. 제가 구술해서 대신 다른 사람이 답을 쓰는 방법도 생각하고 있는데 그럴 여가조차 없습니다. ‘하느님이 계시다면 왜 인간에게 고통을 허락하십니까?’등 젊은이들이 자신이 겪는 고통과 인생문제를 상담하는 메일이 무척 많이 들어왔지요. 제가 일일이 답신을 하는 E메일 대화에는 보통 1건당 평균 100건, 많게는 400건의 조회수가 기록되곤 했죠. 젊은이들과 많은 것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었는데…. 참 아쉬워요.”

―우리 정치 상황이 암울했던 70년대, 돌아가신 지학순주교께서 명동성당에서 양심선언을 하셨을 때 추기경께서 ‘고통 받는 사람을 위한 기도’를 하셨던 것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상황은 다릅니다만 올들어서 오랜 가뭄과 구제역 파동, 강원지역 대형 산불 등 큰 재난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재난으로 고통을 당하신 분들께 위로의 말씀을 건네신다면….

“말로써는 그분들을 위로할 어떤 것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우선 우리가 그동안 너무 선거에 몰입한 나머지 고통받는 사람들의 아픔을 잊고 살았던 것부터 반성해야 할 것 같습니다. 뉴스에서 이재민이 18만명 가까이 된다는 말을 들었는데 실로 엄청난 재해입니다. 실망과 좌절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가져다 주는 것이 없기 때문에 아무쪼록 모든 분들이 고난을 이겨내고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더욱더 복된 일이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새벽까지 선거 개표방송을 보셨다고 말씀하셨는데요, 특별히 관심있게 지켜본 선거구라도 있으셨나요.

“부산에서 출마한 민주당의 노무현, 영남권에 출마한 민국당 이수성 김윤환 박찬종후보 등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봤습니다. 지역감정 속에 이들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 관심이 갔거든요. 개인적으로도 아는 박찬종후보는 이번에 셋방에서 출마했다는데, 앞으로 어떻게될지, 거 참.”

추기경은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등 자신의 저서 두 권에 친필 사인을 해 취재진에 일일이 나눠준 뒤 문밖까지 배웅했다.

<정리〓정은령·전승훈기자> ryu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