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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9년 12월 16일 19시 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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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군 고문치사사건의 주범으로 몰려 징역10년을 선고받고 7년3개월만인 94년4월 출소한 조한경(趙漢慶·당시 치안본부 대공수사2단 5과2계 1반장)씨는 최근 서울 마포구 서교호텔에서 기자와 만나 고문사건의 진상과 배경을 상세히 털어놓았다.
〈신동아 2000년1월호 참조〉조씨에 따르면 박군을 잡아들이기 보름전쯤인 87년1월 초순경 전전대통령이 경찰에 “체제전복 세력의 조직 전모와 배후는 반드시 캐내 관련자를 검거하라”는 취지의 지시를 했다는 것.
조씨는 또 “김종호(金宗鎬) 당시 내무장관이 박군을 연행하기 하루전인 1월13일 치안본부 남영분실을 찾아와 경감급 이상 간부들을 모아놓고 점심을 사면서 ‘대통령 임기가 1년밖에 안 남았다. 정치일정이 있으니까 대학생들의 방학기간 안에 공안사범을 모두 잡아들이라’고 격려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다음날부터 대공수사를 맡고 있던 치안본부 산하 40여개 조사반이 모두 투입돼 공안사범 검거작전에 돌입했고 무리하게 수사하다 보니 박군 사망사건이 발생한 것이라고 조씨는 주장했다.
조씨는 또 “고문치사범이 된 데 대해 스스로 참을 수 없어 그동안 2차례에 걸쳐 자살을 기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며 “거듭나는 의미에서 이름도 조한경에서 조한평으로 바꿨다”고 밝혔다.
조씨는 속죄하는 마음으로 수감시절 박군의 아버지 박정기(朴正基)씨에게 2차례에 걸쳐 편지를 보냈으나 봉투가 뜯기지 않은채 되돌아왔으며 겉봉투엔 용서하기 어렵다는 취지의 한시가 쓰여있었다고 밝혔다.
한편 조씨는 “현재 친척소유의 건물을 관리해주는 대가로 매달 80만원씩 받아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하종대기자〉orionh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