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잃은 사람들]『점심값이라도 벌자』무작정 방황

  • 입력 1998년 1월 13일 20시 04분


지갑속의 2만원을 만지작거리다 점심은 굶기로 결심한다. ‘이 돈이 어떤 돈인데….’

플랜트 건설업체 엔지니어로 일하다 지난해 12월1일 해고당한 한모씨(40·인천 서구 석남3동). 그는 허리디스크를 앓던 아내가 오전 8시부터 밤 9시까지 식당일을 나가 번 돈으로 밤마다 자신의 지갑에 넣어주는 2만원으로 하루를 지낸다.

지난해 말 실직한 식품회사 부장 출신의 황모씨(49·서울 서초구 반포동).

하루종일 버스를 타고 이리저리 다니다 지칠 때면 “아빠, 남들은 진작 회사에서 잘렸는데 그래도 아빠는 여태껏 계셨으니 대단하잖아요”하며 격려하던 부인과 아들을 떠올린다.실직 후 매일 아침 무작정 집을 나서지만 갈 곳이 없다. 집 근처 공원이나 산에 오르는 것도 한두번이다.

지난해 12월20일 S그룹 부도로 실직한 김모씨(32·서울 강남구 일원동). 첫아들을 낳은 아내에게 한동안 실직 사실을 알리지 못했다. 몸조리하는 아내와 처가에 함께 있던 그는 양복을 입고 집으로 출근한 뒤 처가로 퇴근하는 생활을 계속했으나 결국 보름만에 털어놓았다.

실직자들이 번민끝에 마음을 다부지게 먹고 찾아가는 곳은 노동사무소나 인력시장. 하루 종일 일자리를 구해 보려고 애를 쓰지만 재취업이 쉽지 않다.

모 제약회사에 날품을 팔러 갔다가 “얼굴은 젊어 보이는데 나이가 너무 많다”며 퇴짜를 맞았다는 김모씨(46·서울 서초구 서초동), 지난해 9월 H기업에서 퇴직한 뒤 30곳에 원서를 넣었으나 서류전형조차 통과하지 못하고 있는 이모씨(29) 등등…. 이들은 곧이어 본격적으로 닥칠 정리해고 태풍으로 일자리가 더욱 줄기 전에 재취업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자동차 부품업체에 다니다 해직된 박모씨(53)는 지난 4개월간 매달 49만원의 실업급여를 받으며 버텼으나 이제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는 기회도 한 번밖에 남지 않았다며 애타게 노동사무소 직원을 바라보았다.

토목회사에 다니다 지난해 12월15일 공사현장에서 해고통보를 받았다는 안모씨(55). 그는 “젊은 사람도 취직이 안되는 판에 나같은 ‘늙은이’가 어떻게 되겠느냐”고 말하면서도 매일 노동사무소 직업안정과와 인력센터를 찾아다닌다.

안씨는 대학에 다니는 아들이 둘이나 있다며 “점심값만 줘도 좋으니 일할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소연했다.

인력시장을 돌아다니다 지치면 기원이나 소극장 공원벤치 등을 전전하지만 그나마도 돈이 있어야 한다. 지친 몸을 이끌고 귀가하면 집이 더 무서울 때가 있다.

여성 의류업체에 다니다 지난해 11월 정리해고된 김모씨(46)는 부인이 마주치기만 하면 “못 살겠다. 그만 살자”고 해 고민이다.

그러나 실직을 새로운 기회로 삼겠다며 의지를 불태우는 사람도 적지 않다. 자동차 영업소장 출신의 김모씨(47)는 “국제통화기금(IMF)한파가 내 인생스케줄을 앞당겼다”고 말한다. 그는 평소 꿈꾸던 자동차 중개업을 하기 위해 시장조사를 하느라 바쁜 하루를 보낸다.

기업체 이사 출신인 김모씨(55)처럼 “실업급여를 타러 나오는 것이 창피스럽지만 정리해고를 ‘일보후퇴 이보전진’의 전략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받아들이는 모습도 있다.

서울대병원 정도언(鄭道彦·신경정신과)교수는 “실직 후에는 좌절감 등으로 인해 판단력도 흐려지고 성격변화로 가족관계에도 영향을 준다”며 “당분간 현실문제에 대해 걱정을 하지 않도록 가족이 도와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원홍·이훈·권재현기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