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窓]부형권/어느 모범생의 유서

  • 입력 1997년 8월 26일 19시 49분


「맡은 일에 끝까지 최선을 다하며 친구들 사이에 신뢰가 있음. 모범상 수상. 성실하고 노력하는 형임」(학생기록부에서). 「부모님, 제가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지 못하면 저는 괜찮습니다만 부모님께선 주위의 시선이 창피하실 겁니다.… 저는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나 봐요. 다음 세상에 태어나면 공부 잘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겠습니다」(유서에서). 지난 25일 오후 자신이 사는 서울 서초구 반포3동의 아파트 8층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박모군(16·S중3년). 학생기록부에서의 박군은 생활태도 교우관계 과외활동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아무 문제없는 모범생이었다. 단지 성적이 조금 나쁠 뿐. 박군의 아버지(45·자영업) 담임교사 학교장 등은 『이처럼 끔찍한 일이 생길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며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박군이 남긴 세 장의 유서에는 어른들이 알아차리지 못한 자기만의 가슴앓이와 자기때문에 겪게 될 어른들의 곤란함에 대한 걱정이 가득했다. 「(고입시험이) 내신제도로 바뀌어 인문계에 (성적순으로) 60%만 가게 돼서 저는 아무리 노력해도 확실히 갈 수 있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학생이 죽으면 담임선생님이 잘린다고 하는데 우리 선생님 자르지 마세요」. 박군은 자포자기상태가 아니라 자기나름의 확고한 꿈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둘러 싸고 있는 현실이 더욱 고통스러웠는지도 모른다. 「제 꿈은 기술자였어요. 자격증도 많이 따서 훌륭한 기술자가 되었으면 좋겠는데…」(유서에서). 박군의 1, 2학년 학생기록부에도 장래희망은 늘 「기술자」였다. 2학년 때 담임교사는 「노력형이며 만들기에 관심이 많음」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좀 더 많은 추억을 갖고 떠나려고 했는데 더 이상 못 참겠어요」. 여름방학이 끝나는 날 밤 박군이 남긴 유서는 「성적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라는 이유있는 항변을 사회에 던지고 있다. 〈부형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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