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할머니 『내姓은 장씨』…「망각의 세월 54년」고백

  • 입력 1997년 6월 15일 19시 54분


캄보디아의 한 시골에서 54년만에 발견된 한국인 훈할머니의 일생은 우리민족의 아픈 역사 그대로이기도 했다. 검게 그을린 얼굴, 깊게 팬 주름살, 그리고 피로와 고달픔이 가득 밴 얼굴은 그의 인생역정을 한눈에 보여주고 있었으나 여전히 선한 눈빛과 조용한 말투 등 본래 한국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할머니에게 54년은 「망각의 세월」이었다. 고향 모습을 희미하게 기억할뿐 이름조차 잊었으나 기자가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한국인의 보편적인 성씨 몇개를 제시하자 그중 장씨가 자신의 성씨였던 것으로 기억된다고 말했다. 할머니가 기억하는 고향 진동의 모습은 어촌이면서 동시에 농촌이기도 한 마을이었다. 마을앞에는 돌로 만든 긴 방파제가 있었고 마을안쪽으로는 꽤 많은 논과 밭이 있는 제법 큰 동네였다는 것. 그는 서당같은 작은 규모의 동네 소학교에서 또래들과 함께 공부를 했던 것도 기억했다. 어머니는 작은 가게를 하고 있었다. 그는 널뛰기하는 모습이 담긴 한국홍보물을 보여주자 금세 동네 논에서 겨울에 썰매를 탔던 사실도 기억해냈다. 훈할머니의 비극은 영문도 모르게 다가왔다. 꿈많은 10대 처녀였던 43년 어느날 동네에 주재했던 일본인 순사에게 차출이 된 것이다. 같은 또래의 동네 처녀 5명과 함께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트럭에 태워졌다. 훈할머니는 부산으로 추정되는 항구에 도착했으며 그곳에서 수많은 처녀 및 장정들과 함께 3척의 큰 배에 실려 어디론가 떠났다. 희미한 기억에 따르면 그를 태운 배가 처음 도착한 곳은 싱가포르. 그곳에서 다수의 처녀와 장정들을 하선시킨 배는 사이공을 거쳐 프놈펜에 도착했다는 것. 그때부터 할머니는 캄보디아 전역의 일본군 병영을 전전해야만 했다. 당시 위안소에는 한국인 처녀 2명이 더 있었으나 둘다 해방이 되기 전에 병이 들어 죽었다. 일본군은 그들이 죽어가는 것을 알면서도 돌보아주기는커녕 약도 주지 않았다. 캄보디아에 온 몇년 뒤 막내인 남동생이 두차례 『어머니가 오래 살지 못할것 같으니 빨리 돌아오라』는 편지를 보냈으나 일본군 책임자는 귀국허가를 해주지 않았다. 훈할머니가 당시 일본군 중위였던 다다쿠마 쓰토무(只熊力·현재 일본 아시아태평양국회의원연합 사무국장)를 만난 것은 태평양전쟁이 거의 끝나가던 무렵. 다다쿠마는 그를 군위안소에서 빼내 별도의 거처를 마련해주었다. 소위 그의 현지처가 된 것이다. 그들 사이에는 딸도 생겨났다. 전쟁이 끝나자 한국출신 일본군과 한국처녀들은 모두 귀국선을 탔으나 훈할머니는 다다쿠마의 체류권유에 따라 귀국하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게 됐다. 그러나 다다쿠마는 몇년뒤 훈할머니와 딸을 버리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지금도 훈할머니는 다다쿠마에 대해 『불교신자 입장에서는 용서하지만 한 여자로서는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말했다. 다다쿠마가 떠난 뒤 할머니는 생존을 위해서 캄보디아인과 결혼했지만 그는 지독한 술주정꾼이었다. 그와의 사이에도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두었으나 결국 헤어지고 말았다. 캄보디아의 시골마을에서 손바닥만한 농사를 직접 지으며 아들 딸들을 키우고 산 지난날의 삶은 생존과의 전쟁이었다. 그러나 인심을 잃지 않아 지난 70년대 폴 포트 정권의 대학살때는 외국인이면 무조건 죽음을 당했으나 이웃사람들이 도와주어 학살을 면하기도 했다. 그가 한국에서 가져갔던 한국인임을 증명할 수 있는 작은 소지품들과 동생의 편지 등은 그때 모두 다 없애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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