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권 학생들이 집회 또는 시위현장 부근에 있는 시민을 경찰협조자(속칭 프락치)로 오인해 폭행, 숨지거나 다치게 한 「프락치사건」은 과거에도 더러 있었다.
대표적 사례가 5공시절인 84년 서울대의 가짜학생사건. 그 해 9월 법대생으로 신분을 속인 임모씨(당시 26세)가 교내모임에서 학생들에게 발각된 뒤 경찰 프락치임을 자백하고 사흘만에 풀려났다.
프락치에 과민해진 서울대생들을 더욱 자극한 것은 임씨가 풀려난 뒤 재수생 손모군(19) 등 3명이 같은 이유로 학생들에게 붙잡힌 사건이었다. 서울대총학생회는 즉각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당시 야당인 민한당 당사에서 농성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사건으로 「프락치」폭행에 가담한 학생 4명이 제적당했다.
당시만 해도 5공 정권과 학원사찰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운동권의 폭력성이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6공시절인 89년10월 연세대에서 동양공업전문대생 薛仁鍾(설인종·당시 20세)씨가 프락치로 오인받아 학생들에게 폭행당해 숨진 사건은 학생운동의 도덕성에 큰 상처를 주었다.
특히 폭행가담 학생들은 설씨를 탁자위에 엎드리게 하거나 의자에 앉힌 뒤 각목으로 마구 때리고 기절하면 찬물을 끼얹어 정신을 차리게 하는 등의 잔인한 고문수법을 사용해 여론의 거센 비판을 받았다.
또 94년 8월에도 고려대에서 학생들의 농성장 주변을 돌아다니던 田貴熙(전귀희·당시 38세)씨가 기관원으로 오인받아 폭행당하고 풀려난 직후 숨진 사건이 일어났다.
지난 해 7월엔 건국대 학생회관에서 프락치로 오인받아 구타를 당한 金亨根(김형근·당시 26세)씨가 감시소홀을 틈 타 창문으로 뛰어내리다 중상을 입기도 했다.
이런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학생들은 일시 반성하는 듯한 자세를 보이기도 했으나 다시 구태의연한 투쟁방법에 집착하는 악순환을 거듭, 학생운동의 존립 기반을 스스로 허무는 우(愚)를 범하게 됐다.
〈송상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