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합법화된 민주노총 권영길위원장

  • 입력 1997년 3월 11일 07시 45분


10일 국회의 노동법 재개정으로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이 합법단체로 출범하게 됐다. 민주노총은 전국 9백여개 노조 49만여명이 가입해 있는 상급노동단체. 자연히 權永吉(권영길·56)위원장에게 재계와 노동계는 물론 국민의 눈길이 쏠리고 있다. 그와 긴급인터뷰를 갖기 위해 이날 오후 서울 성북구 삼선동 삼선빌딩4층에 자리잡은 민주노총 본부를 찾았다. 자그마한 위원장실에서 결재와 전화받기에 여념이 없던 권위원장은 지난해 말 노동법개악에 항의해 삭발한 머리가 밤송이처럼 자라 있었다. ―우선 민주노총의 합법화를 축하합니다. 95년11월 창립때부터 위원장직을 맡아온 초대위원장으로서 소감은…. 『솔직히 말씀드리면 우리 민주노총은 합법화에 큰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이건 절대 겸양이나 오만한 생각이 아닙니다. 우리가 합법화된다는 건 결사의 자유가 허용된다는 의미인데 그것의 핵심인 교사와 공무원의 단결권 문제는 이번 국회에서 언급조차 안됐습니다.우리는 밖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들떠 있지 않습니다.어떻게 새 노동법 문제를 풀까하는 더 중요하고 더 큰 고민에 빠져있습니다』 ―민주노총의 합법화로 재계와 정부당국 등 일부에선 노동현장이 더 과격해지는 것 아니냐는 걱정을 하고 있는데요. 『정부, 특히 공안당국에서 현재 우리나라 노동조합의 역량과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데서 그런 우려가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정부나 재계는 민주노총 산하 단위 노조에 외부 영향력이 미친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 생각을 사실인 것처럼 믿고 있습니다. 바로 거기에서 오류와 오판이 생기는 것입니다. 물론 지난 87년 노동계 대투쟁 직후엔 사회단체의 지원이 있었고 몇몇 큰 사업장에 대학 운동권 출신이 취업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4,5년 지나면서 이제 현장 노조원이 완벽하게 역량을 갖추고 있습니다. 민주노총이 외부 세력의 영향이나 도움을 받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정부나 재계가 그걸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경제가 어렵습니다. 이제 노조도 투쟁이나 반대 위주의 활동보다는 경제에 책임을 함께 지는 자세가 필요할 때라는 소리가 높습니다. 『국민에 대해 책임지는,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책임지는 노동단체가 돼야 한다는 게 바로 우리가 가장 중요시하고 줄곧 강조해온 대목입니다. 노조는 당연히 경제와 사회의 책임있는 주체이고 그에 맞게 행동해야 합니다. 노동운동 하면 막연히 목소리만 높고 과격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경제가 위기라는 것도 인정합니다. 사실 민주노총은 누구보다도 경제의 어려움을 강하게 주장해 왔고 경제위기의 정확한 원인을 객관적으로 분석, 해결방안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하지만 재계의 주장만 세상에 알려지고 우리 노동계가 분석하는 경제위기 원인과 대안은 알려지지 않으니 마치 노동계가 투쟁만 하는 것처럼 비쳐진 것이지요』 ―그렇다면 민주노총이 보는 경제위기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정부와 재벌들은 근로자들의 고임금과 낮은 생산성을 자꾸 문제 삼는데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생산성 하나만 놓고 봐도 기능공 개개인의 생산성은 우리가 일본과 같은 수준이에요. 그런데 기업의 생산성은 떨어집니다. 경영생산성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지요. 더구나 심각한 것은 근로자들의 사기가 자꾸 떨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근로의욕이 떨어지면 경제 발전은 어렵습니다. 현장에서 보면 1,2년 전보다 훨씬 사기가 떨어져 있어요. 정리해고제만 해도 그래요. 그것 없이도 얼마든지 해고해오지 않았습니까. 왜 근로자들을 불안하게 해 사기를 저하시킵니까. 이런 분위기가 씻어지지 않으면 경제 도약은 어렵습니다』 ―이번 노동법 재개정으로 그동안 노조가 없었거나 활동이 미약했던 일부 대기업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는데요. 『삼성이나 포철 등 무노조 기업에 대한 민주노총의 입장은 분명합니다. 노조를 인정하지 않는 그런 노사관과 경영의식을 가진 총수가 이끄는 재벌중심으론 우리 경제가 현재의 어려움을 뛰어넘어 도약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우리 민주노총의 입장입니다. 경제의 발전을 위해서도 결사의 자유는 인정돼야 합니다. 결사의 자유가 이뤄지지 않으면 얼마 안가 선진국들이 노동운동을 탄압하는 기업의 상품이라는 이유를 들어 경제제재를 하려는 움직임이 구체화될 것입니다. 과연 언제까지 무노조로 갈 수 있겠습니까. 그건 국가 경제발전을 저해하는 행위입니다. 아직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 건 아니지만 우리는 삼성이 무노조를 고수한다면 그걸 철폐할 것입니다. 감정적 대립을 위해서가 아닌 경제발전을 위한 것입니다』 ―재계에선 그동안 유일한 합법 상급단체였던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의 선명성 경쟁을 우려하는 소리도 나오고 있습니다. 『민주노총이 합법화된다 하니까 심지어 두 단체간에 「땅따먹기식」 선명경쟁이 벌어질 것이라는 소리까지 나오더군요. 하지만 솔직히 말씀드려 우리는 한국노총과의 선명성 경쟁은 생각해 본 적도 없습니다. 다 정부나 재계가 일방적 기준을 갖고 만든 말입니다. 한국노총 일부에선 민주노총이 한국노총 조직의 일부를 흔들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나본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노총의 조직을 빼낼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우리는 민주노총의 새 모습, 참모습을 국민에게 보여 인식을 바꾸는데 진력할 것입니다. 국민속으로 뛰어들 겁니다. 국민과 함께 한국경제의 문제와 발전방향을 토론하고 대안을 제시할 겁니다. 결국 경제발전과 사회개혁을 어떻게 이루느냐가 가장 중요한 것이지 조직확충은 부차적 문제에 불과합니다』 ―한국노총과의 통합 용의는 없습니까. 『각자 노조활동을 하다보면 언젠가는 자연스레 하나가 될 수도 있겠지요. 어느 나라든 노동운동은 여러 갈래인 것보다 하나로 뭉치는게 바람직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조직 상층부의 인위적 통합은 부작용이 더 크다고 봅니다』 ―새 노동법이 국회를 통과했는데 환영할 만한 부분과 미흡한 부분은 어떤 점입니까. 『사실 환영할 만한 대목은 없습니다. 예전 노동법에 비해 많이 후퇴했고 날치기법에 비해서도 나아진게 몇개 조항에 불과해요. 거의 개선된 게 없다고 봅니다. 이른바 3금(복수노조 제삼자개입 정치활동 금지) 3제(정리해고 변형근로 파견근로제)중 3금은 사실상 그대로 남아 있고 3제만 도입(파견근로제 제외)됐어요. 우려되는 것은 올해 현장에서 노사갈등이 유례없이 심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노조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가 5년 유예됐다 해도 아마 몇개 사업장에선 사용자들이 「전임자 임금 깎자」고 들고 나올테고 그러면 충돌은 불가피해요』 ―지난번 총파업을 주도했던 민주노총이 앞으로도 투쟁강도를 늦추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로 들리는데요. 『막연히 투쟁 일변도로 나가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어요. 어떻게 대처해 나갈지 고민중입니다』 ―5월 총파업설도 들리는데요. 『총파업에 대해선 아직 방침이나 일정을 정한 바가 없습니다. 우리도 임금단체협상과 연계는 해야겠지요. 지금으로선 총파업을 하겠다고 분명히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노조전임자 임금 등 현안이 여러 사업장에서 일어날테고 그렇게 되면 전국적 차원에서 투쟁을 해야하느냐 마느냐로 고민할 겁니다』 ―일각에선 권위원장의 온건한 이미지를 들어 「민주노총의 간판으론 적당치 않다」 「강경파 위에 허수아비처럼 얹혀 있는 것 아니냐」는 소리를 하기도 하는데요. 『사실 전 온건한 성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이 위원장인 걸 봐도 민주노총 자체가 온건 합리적 조직임을 알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아마도 「노조위원장은 과격한 사람」이라는 선입관, 「민주노총은 과격하고 급진적이다」는 편견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 소리가 나올 겁니다. 저는 정부나 재계가 갖고 있는 그런 고정된 선입견을 바꾸기가 참 어렵겠구나 하는 절망감을 느낄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사실 지난번 총파업 때도 그랬고 과격 강경일변도로 주도된 적이 없어요. 내부적으로 충분한 토의 속에서 결정이 이뤄집니다』 권위원장은 이 대목에서 마음이 답답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하다못해 노동부장관도 민주노총 위원장을 만나면 큰일 나는 걸로 생각해요. 정부나 재계는 항상 노동계의 책임있는 자세가 경제회복의 관건이라고 강조하면서 왜 만나길 꺼리는 겁니까. 전경련 등 재벌과도 대화를 원합니다』 〈정리〓이기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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