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식한 연변 아줌마’ 취급 당했는데…‘1호 탈북 박사 부부’ 된 사연[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주성하 기자 입력 2020-11-20 14:00수정 2020-11-20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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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한 매체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김영희 씨. 김영희 씨 제공.

‘따르릉… 따르릉….’

전화벨 소리가 사납게 울렸다. 전화기를 내려다보는 서울 양천구 한 카센터 경리 김영희 씨의 심장이 벨소리만큼 사정없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황급히 문을 열고 소리친다.

“기사님~~. 전화 왔어요.”

주요기사
손에 기름을 잔뜩 묻히고 차를 수리하던 정비사는 인상을 찌푸리고 소리친다.

“아, 그냥 받으라니까.”

김 씨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들었다.

“소중히 모시겠습니다. ○○카센터 XX 대리점입니다.”

전화기에서 중년 남성의 소리가 날아온다.

“아, 왜 이렇게 전화 안 받아요. 앞 범퍼 수리해야 하는데 얼마예요?”

“예, 앞 범버요. 앞 범버가 뭐예요?”

“아니, 앞 범퍼도 몰라. 근데 아줌마 연변에서 왔어요. 아, 짜증나. 사장 당장 바꿔.”

사장이 전화를 받으면 고객은 고래고래 소리친다.

“어디서 앞 범퍼도 모르는 연변 아줌마 내보내고 한국 아가씨 쓰세요.”

하루에도 이런 전화가 수없이 날아왔다.

어떤 때는 처음 보는 남성이 들어와 김 씨를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아줌마가 전화 받은 연변 아줌마나”라고 하기도 한다. 보통 반말이다.

“저 연변 아닌데요.”

“그럼 어디서 왔어?”

“북한에서 왔습니다.”

거짓말을 할 수 없어 솔직하게 대답하면 고객은 북한 사람을 처음 본다며 “북한에서 사람 잡아 먹는다는 게 사실인가. 굶어죽는 사람이 많냐”는 질문을 던진다.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다보면 보통 고객은 단골이 되곤 했다. 이 카센터는 김 씨가 한국에 정착한지 2개월 만에 교회 집사를 통해 어렵게 구한 일자리였다. 정작 일을 시작하니 회계보다는 전화를 받아주는 것이 주업이었다.

들어가자마자 사장 부인이 한국에서는 전화 받을 때 이렇게 해야 한다며 메모지에 “소중히 모시겠습니다. ○○카센터 ㅇㅇ대리점입니다”라는 글을 적어 외우게 했다.

고객이라는 개념이 없는 북한에서 살았던 김 씨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이 말이 참으로 간지럽게 느껴졌다. 또 필요한 사람이 찾아오면 그만인데 왜 굽신거리며 인사해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할 수 없이 메모지를 전화 앞에 붙여놓고 계속 연습했다. 일주일쯤 돼서야 겨우 그 말이 입에 붙었다.

인사는 배웠지만, 그 이후 대화는 더욱 힘들었다. 전화만 오면 가슴이 벌렁거린다. 차종과 부품명을 전혀 모르니 고객의 욕설을 수시로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소나타, 그랜저, 스타렉스, 핸들, 후사경, 엔진오일, 미션오일, 승용, 승합 등 단어를 열심히 외우며 조금씩 적응해 갈 무렵 위기가 찾아왔다. 성격 급한 고객이 연변사투리 때문에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며 카센터까지 찾아와 민원을 넣었다.

2주 만에 김 씨는 사장에게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있을 곳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장님. 미안합니다.”

착한 사장은 손사래를 쳤다.

“다 그렇게 시작하는 거죠. 난 괜찮아요. 기죽지 말고 계속 해요. 하다 보면 잘 할 겁니다.”

그 말에 힘을 입어 버티고 버텨보려 했다. 손님들이 찾아와 아는 체를 하면 힘도 생겨났다. 그러나 “당장 경리를 바꾸지 않으면 내가 카센터를 본사에 신고해 고객점수 하나도 못 받게 하겠다”는 욕설에는 견딜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입사 2개월 만에 “사장님. 저 때문에 카센터가 너무 피해를 받는 것 같아 더는 있을 수 없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고 편지를 써놓고 몰래 사무실을 나왔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김 씨는 펑펑 울었다. 집에서 기다리는 9세, 7세 된 아들들은 이제 어떻게 먹여 살려야 할까. 아이들은 고사하고 자기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그 때가 2003년 9월이었다.

# 사회주의 직장생활


한국의 카센터에서 매일같이 ‘무식한 연변 아줌마’ 취급을 당하긴 했지만 김 씨는 북한에서 종업원 4500여명의 특급 기업소에서 수하에 30여명의 통계원(회계원)을 두고 재정경리 업무를 담당하던 재원이었다.

1965년 함북 길주군 의사의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학교 다닐 때 항상 학년에서 1등을 놓치지 않는 소녀였다. 분단위원장, 사로청부위원장 등 학교 간부도 그의 몫이었다.

김 씨는 3남3녀 중 둘째였는데, 그의 형제는 한 명 빼고 모두 대학을 졸업했다. 학교 졸업생의 15~20% 정도만 대학에 가는 북한에서 보기 드문 인텔리 집안인 셈이다. 대학에 못 간 막내는 김 씨가 탈북하는 바람에 추천을 받지 못했다.

1981년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김 씨는 교원이 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학교에 교원대학 추천서가 내려오지 않았다. 대신 북한에 하나 밖에 없는 경제대학이자 중앙급 대학인 원산경제대학 추천서가 학교에 왔다.

누가 봐도 훨씬 더 좋은 대학이지만, 김 씨는 교원이 될 수 없다면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드러누웠다.

그러자 아버지가 그를 달랬다. 대학에 안 가도 좋으니 그냥 이 참에 가기 힘든 원산에 가서 구경이라도 하고 오라는 것이었다. 평양 제1병원 준의(준의사)였던 아버지는 같은 병원에서 준의였던 어머니와 연애해 결혼했다. 나중에 해주의학대학을 졸업해 정식 의사가 된 뒤 한번도 고향이라고 생각해 본적 없는 함경북도 길주에 의사로 배치 받았다. 평양에서 살다가 지방으로 내려왔지만, 부모님의 교육열은 대단했다. 그 덕분에 형제들은 학교에서 간부를 도맡아 하면서 성장했다.

아버지의 설득에 넘어가 김 씨는 원산에 가서 시험을 쳤다. 한 달 뒤 합격통지서가 날아왔다. 그래도 교원이 못될 바에는 가지 않으려 했는데 이번엔 아버지가 엄한 얼굴로 말했다. “너 대학에 가지 않으면 평생 후회한다.”

결국 그는 원산에 가 5년6개월 과정을 마치고 졸업했다. 졸업한 뒤 강원도 회양군에서 3년 동안 3대혁명 소조원으로 일하면서 자동판매기를 도입하는 등 업적도 세웠다.

3대혁명 소조원 생활을 마치고 중앙당에서 내려와 어디로 가겠냐고 물었을 때 그는 평양에 가겠다고 했다. 부모님의 소원이 죽을 때 고향문턱을 베고 죽는 것이었기에 그 꿈을 이뤄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역시 출신 성분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안으로 선택한 것이 평양에서 가까운 남포였다. 남포에 간 그는 수출입 관련 특급 기업소의 재정부기과 지도원으로 배치돼 채권, 채무를 담당했다. 사회주의 경제 시스템에도 엄연하게 채권과 채무가 존재했다. 회계장부에는 채권 대신에 ‘받을 돈’, 채무 대신에 ‘물어줄 돈’이라고 적혀 있긴 했지만 그의 직책은 분명 채권채무 담당 지도원이었다.

강원도에서 살다가 남포에 간 김 씨는 기업소 구내에 산더미처럼 쌓인 엄청난 물자를 보는 순간 ‘우리나라가 이렇게 잘 사나’ 싶어 깜짝 놀랐다고 했다. 각종 물자가 다 있었다. 1990년대 초반 제주도에서 북한에 보낸 귤도 실컷 먹었다고 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거짓말처럼 창고들이 텅텅 비기 시작했다. 출근길엔 꽃제비들이 시체가 돼 방치됐다.

김 씨의 기업소는 북한에서도 유명한 기업이라 말 사료로 들어온 통밀을 주긴 했지만 배급은 꼬박꼬박 주었다. 그럼에도 그는 고난의 행군을 거치며 기업소 4500여명이 모두 도둑놈으로 변하는 과정을 지켜봤다.

“사람들이 아침에 출근할 때 도시락 두 개씩 가져와요. 그리고 퇴근할 때 도시락에 창고에 쌓여있는 식량을 몰래 채워 가는 거죠. 경비대가 총을 쥐고 단속하지만, 그들에게 적당히 나눠주면 눈을 감아주었어요.”

김영희 씨가 2017년 탈북청소년 대안학교인 우리들학교에서 자신의 탈북스토리를 이야기하고 있다. 김영희 씨 제공.


# ‘어쩌다보니’ 탈북


2002년 어느 날 함경북도 국경에 살던 시어머니가 남포에 왔다. 그는 중국 형제들을 방문하고 왔다며 달러와 각종 물건들을 가져왔다. 김 씨는 1992년 결혼했는데, 결혼하고 나서야 남편의 부모가 중국에서 살다 북에 온 사람임을 알았다.

시어머니는 김 씨에게 중국 구경을 해보는 게 어떠냐고 설득했다. 특색있는 사회주의를 한다는 중국의 모습이 보고 싶었고 많이 궁금했다. 그래서 시어머니 진갑 잔치를 명분으로 아이들까지 데리고 떠났다. 그것이 북한에 남겨진 어머니와의 영원한 이별이라는 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며칠 동안 기차를 타고 도착했더니 이미 시어머니가 브로커까지 물색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까지는 전혀 생각도 못했어요. 남포 집을 전혀 정리도 못했죠. 이렇게 올 줄 알았으면 사진이라도 챙겨왔을 걸….” 김 씨는 지금도 멋모르고 떠났던 일이 마음에 맺힌다.

남편을 따라 아이들을 데리고 중국으로 가면서도 김 씨는 ‘중국에 가서 구경 좀 하고 돈 좀 받아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어느 날 산을 세 개 넘어 두만강에 갔다.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야밤에 강으로 접근하는데 남편과 브로커, 둘째 아들이 갑자기 땅이 꺼지며 사라졌다. 서로 소리쳐 부를 수도 없는 곳이라 그들은 옥수수 밭에 숨어 밤새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아침이 돼 보니 그들 바로 코앞이 국경경비대 잠복초소였고, 총을 멘 군인들이 아침 식사를 하려 돌아갔다. 낮에 슬금슬금 낭떠러지로 다가가 살펴보니 남편 일행 역시 다시 올라올 수도 없고, 소리쳐 부를 수도 없어 거기에 숨어있었다.

하늘이 도왔는지 그들은 기적처럼 다시 만났다. 지체하면 경비대가 다시 초소로 올 시간이다. 제대 2개월을 앞둔 군인이 브로커였는데, 군복을 벗어놓고 팬티 바람으로 가족과 함께 두만강을 건넜다. “어디 가서든 조국은 잊지 마십시오” 브로커였던 군인이 헤어지면서 한 말이다.

“돌아올 건데 왜 저런 말을 하지 의아했죠. 지금 생각해보니 그 군인은 가족이 강을 넘는 것을 보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던 것 같아요. 저만 몰랐죠.”

두만강을 넘은 이튿날 시어머니와 두 아들은 먼저 하얼빈(哈爾濱)의 친척집으로 떠났고 김 씨 부부는 북한 국경경비대가 마주 보이는 두만강가 조선족 집에서 일주일동안 머무르다 나중에 하얼빈으로 떠났다.

친척집에 한 달 정도 머물고 있던 때에 이웃의 신고로 공안에 체포됐다. 벌금 1만 위안을 내겠다고 말하고 석방되긴 했지만 불안해서 그날 중으로 도시를 떠나야 했다.

그때 한국에 가있던 시누이한테서 전화가 왔다.

“함경도에 살던 시누이가 중국에 가서 사는 줄 알았는데, 한국으로 간 줄은 저도 몰랐어요. 그가 한국에 오는 선을 알려주더군요.”

그들은 몽골을 통해 한국으로 오는 노선을 선택했다. 시어머니도 당초 북에 돌아가려 했는데 예정에 없이 한국에 왔다. 차를 타고 몽골 국경까지 가는데 운전기사가 한족이었다. 그들 가족 중엔 중국어를 하는 사람은 시어머니밖에 없었다. 말 모르는 운전기사에게 아들 며느리와 손자들을 맡길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시어머니도 차를 타고 아들을 따라 몽골에 왔다. 중국과 몽골 국경의 높은 철조망을 초인적 힘으로 넘어 자유를 찾았다.

2003년 12월 가족은 드디어 한국에 도착했고, 이듬해 4월 하나원을 졸업했다. 하나원에서 앞으로 살 지역을 배정받는데 모두들 서울에 가겠다고 해서 제비뽑기를 해야 했다. 김 씨는 운이 좋게 서울을 뽑았다.

사무실에서 업무에 열중하고 있는 김영희 씨. 2014년 정책금융공사 북한경제팀장 시절이다. 김영희 씨 제공


# 귀가 뚫리다


“한국 사회에 나와서 우리의 목표는 세탁소를 차리는 것이었어요. 하나원에서 성공한 탈북민의 성공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가 세탁소를 한다는 이야기에 당시 하나원 동기였던 40여명의 교육생이 모두 사회에 나가면 세탁업을 하겠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세탁소를 하려니 돈을 벌어야 했다. 한국 사회에 나오지 마자 일자리를 찾았지만 좀처럼 찾기 어려웠다. 어렵게 구했던 카센터 경리일은 두 달 만에 그만두었다.

그때 탈북민 지원단체인 ‘새조위’의 신미녀 대표가 집에 찾아왔다. 북에서 갓 온 탈북민을 면담하기 위해 수소문하다가 부부 모두 북한 중앙대학 졸업생인 이들을 소개받은 것이다.

“한국에 와서 탈북민 면담을 여러 차례 했는데, 모두 오라고만 했지 직접 집에 찾아온 사람은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그게 인연이 돼서 새조위에서 일하게 됐어요.”

새조위에서 일하면서 김 씨는 국회의원, 교수, 의사 등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됐다. 그들을 보면서 그는 “여기 와서 배우지 않으면 내게 기회는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2004년 남편과 함께 경남대 북한대학원대 석사 과정에 입학했다. 부부는 2006년 석사 학위를 마치고 바로 동국대 북한대학원 박사 과정에 나란히 입학했다.

“외국에 나가면 외국어에 익숙해 귀가 뚫릴 때까지 기간이 있다고 하잖아요. 우리가 그랬어요. 패러다임이 어떻고, 매커니즘이 어떻고 하는데 도무지 뭔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녹음을 했다가 집에 와서 남편과 함께 같이 들으며 사전을 찾아보며 배웠어요. 3년이 되니까 귀가 뚫리더군요. 교수님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고 할 때마다 ‘이거면 이거고, 저거면 저거지 도대체 뭘 가르치지’ 혼돈스러웠습니다. 그게 당에서 가르치는 정답만 배웠던 북한식 사고방식 때문이었던 것이죠.”

자존심을 내려놓는 것도 쉽지 않았다. 석사 논문 심사 때 담당 교수가 논문 절반을 버리고 다시 쓰라고 했다.

“온 밤 눈물 한 동이는 흘렸던 것 같아요. 석사 안 하다고 했어요. 교수님이 여기에서 살려면 여기 방식을 받아들이라고 설득했죠. 그때가 참 힘들었던 것 같아요.”

박사 과정에 들어가고 나니 그제야 방식이 뭔지 느낌이 왔다. 귀가 열리고, 차이를 인정하니 박사 과정은 석사 때보다 힘들지 않았다.

김영희 씨와 남편 김병욱 씨가 나란히 박사 학위복을 입고 사진을 찍었다. 2013년 김영희 씨가 박사 학위를 수여받을 때 찍은 사진이다. 김영희 씨 제공.


# 1호 탈북 박사 부부


석사를 마쳤을 때 그에게 기회가 왔다. 산업은행에서 ‘북한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한국에서 석사 학위를 마친 북한 경제 조사 직원’을 특별채용으로 뽑는다고 한다.

“제가 행운을 잡았던 것은 분명했죠. 그러나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온다는 말이 뭔지 그때 느꼈죠. 제가 한국에 와서 열심히 석사 학위를 따지 않았으면 그런 기회를 잡았을까요.”

2006년 그는 산업은행에 입사했다. 일을 하면서 박사 공부까지 하려니 너무 힘에 부쳤다.

남편은 2011년 박사를 받았다. 김 씨는 2013년 박사 학위를 받았다. 탈북민 최초의 부부 박사가 탄생한 것이다. 남편인 김병욱 박사는 현재 (사)북한개발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정말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어요. 박사 논문 쓸 때 교수님이 힘들겠다고 직장 앞에까지 두 번이나 찾아와 논문을 지도하고 갔어요. 정말 과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산업은행 북한연구팀 연구원으로 들어갔지만 보고서 쓰는 것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 나이가 한참 어린 선임이 새까맣게 고친 보고서를 보고 기가 막혔지만, 집에 가서 다시 필사를 해가며 하나하나 적응해나갔다.

북한연구팀이 정책금융공사로 분리됐을 때 그쪽으로 옮겨갔다가 2015년 산업은행과 통합하며 다시 돌아왔다.

2013년 2월 박사 학위를 받고 이틀 뒤 그는 북한경제팀장으로 임명됐다. 김 씨는 그때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저는 계약직 탈북민이잖아요. 저는 팀장이 될 수 있다고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저를 팀장으로 임명해주니 너무 감동했죠. 이런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는 것이 그때 비로써 실감이 나며 뿌듯했습니다.”

팀장을 거쳐 산업은행 선임연구위원을 맡고 있는 지금도 그는 은행에 늘 빚을 진 심정으로 살고 있다.

“항상 고민하죠. 탈북민에게 이런 과한 직책을 주었는데 내가 과연 제대로 잘 하고 있는 것일까. 명절도 늘 편안하지 못합니다. 내가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지, 너무 부족한 것은 아닌지 항상 고민하죠.”

열심히 노력한 결과 그는 2007년 산업은행에 입사한 이래 북한 경제전문가로 인정받아 수많은 국가기관 임명직을 지냈다. 그가 정책자문을 지낸 부처만 국회, 통일부, 외교부, 국방부, 해수부, 기재부 등 수없이 많다.

김영희 씨가 2016년 한 북한정책포험 세미나에 발표자로 참가했다. 김영희 씨 제공.


# 고진감래


탈북 1호 박사 부부의 아침은 논쟁으로 시작하는 날이 많다. 북한에서 이슈가 터졌다면 둘은 식탁에 앉아 자기 생각을 펼치다가 말다툼까지 간 적도 많다.

“서로 언쟁을 하지만 서로 도움이 돼요. 서로 다른 생각을 들으면서 아이디어가 막 떠오르죠. 북한을 이해하고 분석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고요. 남편과 같은 일을 하다보니 공저로 두 편의 책을 펴내기도 했죠.”

두 아들은 그런 부모를 보며 자랐다. 탈북할 때 가시에 찔리며 맨발로 두만강까지 오면서도 한마디 비명소리도 내지 않았던 어린 아들들은 이제 20대 청년으로 성장해 대학에 다니고 있다.

“정말 아이들을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죠. 부부가 박사까지 하면서 관심을 돌릴 겨를이 있었겠습니까. 처음에 아이들이 여기 초등학교에 들어가니 ‘무장공비’라고 놀림을 받았어요. 그랬던 아이들이 모두 씩씩하게 스스로 잘 자랐어요.”

막내아들은 유치원 때 북한을 나와 한국어를 떼지 못하고 초등학교에 갔다. 처음엔 시험만 쳤다고 하면 0점을 도맡아 받아왔다. 그랬지만 한국어를 공부한 뒤로는 1년에 책을 500권 이상 읽기 시작했고, 5학년 때 서울교육대학 영재교육 추전을 받았다. 큰 아들도 카이스트 영재교육을 받고 상하이청소년엑스포에서서 발표를 하기도 했다.

“아이들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들어요. 탈북민도 좀만 적응할 시간을 두고 지켜봐주면 스스로 알아서 잘 정착할 수 있다고요. 결국 몇 년은 헤맬 수 있지만 그게 다 정착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탈북민도 스스로 자기에게 인내하는 법을 배워야 훌륭하게 정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인가. 김 씨의 삶의 좌우명은 ‘고진감래’라고 한다. 북에서부터 갖고 있던 좌우명이라고 한다.

“학교 때 아무리 힘들어도 교과서 몇 개를 외우고 나면 분명 높은 점수가 따라왔어요. 고생한 것만큼 좋은 결과가 오는 것을 그때 알았죠. 지금 돌아봐도 저의 인생 자체가 고진감래입니다.”

모든 탈북민이 그러하듯 김 씨의 꿈도 빨리 통일이 돼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고향에 가면 1호점을 낼 겁니다. 뭘 차려도 1호점이 될 거 아니겠어요. 그때는 한국에서의 경험도 살려서 정말 잘 할 수 있겠죠. 돈을 벌기 위해서보다 고향사람들과 뭔가 함께 하고 싶어서요.”

꿈을 이야기할 때 그의 목소리는 떨렸고, 톤도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의 꿈이 실현될 수 있을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꿈이 있는 한 그의 삶도 항상 반짝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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