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약없이 슬로건 나열 투표장 안내도 엉터리 ‘점자공보’ 있으나마나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4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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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D-6]‘묻지마 공약’ 남발
시각장애인들 “뭘보고 뽑으란건지”

“뭐가 똑같다는 거죠?”

6일 시각장애인 천상미 씨(41)는 20대 총선 후보자의 점자형 선거공보와 비장애인들이 보는 책자형 선거공보를 비교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점자 공보에는 ‘일반 공보와 같은 내용’이라는 문구가 점자로 박혀 있었다. 천 씨는 손으로 더듬거리며 점자 공보 6장을 30분 동안 꼼꼼히 읽었다. “다 읽었지만 후보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네요.”

이번 총선은 시각장애인의 참정권을 보장하기 위해 점자 공보의 제작과 배포가 의무화된 첫 선거다. 동아일보가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의 도움을 받아 서울 구로을 지역에 출마한 후보자 4명과 비례대표 후보자를 낸 정당 10곳의 점자 공보를 비교한 결과 정보 누락, 오타 등 곳곳에서 문제점이 드러났다.

새누리당과 국민의당의 점자 공보에는 비례대표 후보자 명단이 아예 없었다. 천 씨는 “후보 이름도 모르는데 뭘 보고 투표를 하느냐, 우리를 유권자로 보지 않는 것 같다”며 씁쓸해했다. 공약에 대한 정보도 부족했다. 강요식 새누리당 후보는 일반 공보에는 ‘품격구로’ ‘교육구로’ 등 5가지 슬로건과 세부 공약을 자세하게 담았지만 점자 공보에는 오직 슬로건만 적혀 있었다.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가리봉동 고가차로 철거를 공약으로 내놓았지만 이 내용은 점자 공보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오타도 많았다. 강 후보는 점자 공보에 자신의 과거 이력을 현직으로 잘못 썼다. 새누리당 점자 공보에는 ‘자유학기제’가 ‘자유학개제’로 쓰여 있었다. 일반 공보는 기호 순서대로 잘 정리돼 배송되지만 점자 공보의 순서는 뒤죽박죽이었다. 시각장애인 김훈 씨(44)는 “순서를 맞추는 데에만 오랜 시간이 걸렸다”며 한숨을 쉬었다.

선거공보와 함께 배송되는 1장짜리 투표장소 안내문에는 점자 대신 QR코드(스마트폰용 바코드)가 인쇄돼 있었지만 시각장애인들이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QR코드를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게다가 이 QR코드를 찍자 엉뚱하게도 청각장애인을 위한 수화용 투표안내 동영상이 나왔다.

시각장애인들이 “형편없다”고 입을 모은 이번 점자 공보는 장애인들에 대한 기본적인 배려도 하지 않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잘못된 법 개정 탓이다. 지난해 공직선거법을 개정하면서 점자 공보의 면수를 일반 공고와 같은 6장으로 제한했다. 똑같은 내용을 점자로 표현하면 그 분량이 3배가량 늘어난다는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강완식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정책팀장은 “당시 점자 공보의 면 제한을 폐지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반영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선관위는 뒤늦게 “문제가 있으면 선거가 끝난 뒤 법을 개정하겠다”고 했다.

김호경 기자 whalefisher@donga.com·김지환 채널A 기자
#공약#점자공보#시각장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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