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미현]보통 땐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국회선진화법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3월 31일 03시 00분


코멘트

다수결원리 反하는 선진화법… 국회의장의 법안직권상정을 국가비상사태 등으로 제한
‘평상시’엔 아무것도 못하게 막아… 계엄 선포할 화급한 상황이면 입법으로 문제해결 가능할까
지킬 의사도 없이 만든 법은 입법권에 대한 모독이다

이미현 객원논설위원·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미현 객원논설위원·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민사소송법에는 소송비용은 패소 당사자가 부담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사람들은 법 적용 결과가 자기에게 불리하면 그런 법이 어디 있냐고 투덜대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래도 자기가 진 소송에서 왜 상대방의 소송비용까지 부담해야 되냐고 따지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우리 사회에서 패소자의 소송비용 부담 원칙은 단순한 법 규정을 넘는 보편적 상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원칙도 모든 국가가 공통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미국에서는 당사자 간에 별도 합의가 없다면 소송비용은 각자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다. 처음 들었을 때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패소 시 상대방 비용을 배상해야 하는 부담으로 인해 소송을 통한 권리 실현을 주저하게 되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란 설명을 들으니 수긍이 갔다.

살다 보면 이렇듯 상반되는 얘기를 하고 있음에도 어느 한쪽이 꼭 틀린 것은 아닌 경우가 종종 있다. 서로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소수의 선각자만이 예견 가능한 상황이 존재하는 경우에는 오히려 소수 의견이 더 옳은 의견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견이 대립하는 상황에선 결론을 내리기에 앞서 서로 다른 목소리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는 시간을 갖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충분한 대화를 나누었음에도 여전히 생각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면 그 문제는 결국 다수결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 중간 지점에서 만날 수 없어 어차피 한쪽으로 뛸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향해야 하지 않겠는가? 다수결은 생각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한 가장 현실적 해결 방안이다.

얼마 전 테러방지법과 관련하여 야당 의원들이 우리나라 헌정 사상 최장 필리버스터 기록을 경신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2012년 개정 국회법(국회선진화법)에 대한 논란이 더욱 뜨거워졌다. 작금의 상황에서 보는 것처럼 국회선진화법이 도입한 필리버스터 제도는 적어도 신속하고 효율적인 입법에는 도움이 안 되는 제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리버스터와 다수결의 원칙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서로 다른 방법으로 민주사회를 지탱하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무제한 토론을 하던 중 회기가 종료되면 해당 법안은 자동으로 다음 회기의 첫 본회의 표결에 부쳐지므로 필리버스터만으로 다수당이 지지하는 법안의 통과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다. 단지 다음 회기까지 결정을 미룰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렇게 얻어낸 다음 회기까지의 냉각기간은 소수당이 반대 여론을 형성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다. 즉, 필리버스터의 비효율은 다수의 횡포를 막는 안전장치를 확보하기 위해 치르는 대가인 셈이다. 그 대신 그러한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회기까지 주도적인 반대 여론 형성에 실패하였다면, 해당 법안은 다수의 국민이 선택한 다수당의 의사에 따라 처리되는 것이 다수결을 기본 원칙으로 하는 민주사회의 정의다.

그런데 다양한 생각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국회선진화법이 국회의장의 법안 직권상정을 천재지변·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와 의장이 각 교섭단체 대표와 합의한 경우로 제한하고 있는 대목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77조는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 시에는 대통령에게 계엄을 선포할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해야 할 정도로 화급한 상황에서 국회의 입법을 통해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거의 없다. 반면 우리가 살아가는 기간의 대부분은 그런 화급한 상황은 존재하지 않는 ‘평상시’인 것이다. 그럼 ‘의원님’들은 도대체 언제 그들의 본업인 입법 활동을 하겠다는 것일까?

사인 간에 작은 합작회사를 설립하는 경우에도, 회사의 의사결정은 과반수 찬성이 원칙이며, 50 대 50 투자라면 의사결정의 교착상태(deadlock)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합작계약서에 규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국회선진화법은 교착상태가 발생하더라도 ‘천재지변·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하지 말자고 규정한 합작계약서인 셈이다.

그래도 명색이 국민의 대표인데 이런 황당한 내용이 그대로 지켜지리라고 믿고 법을 만들 만큼 판단력이 부족할 리는 없다. 법은 우리가 지켜야 하는 사회규범 중에서도 특히 강제력이 부여된 규범이다. 지킬 의사가 없이 법을 제정하였다면, 이는 입법권에 대한 모독이다.
 
이미현 객원논설위원·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민사소송법 소송비용#테러방지법#필리버스터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