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관련 기관 못 가게 했더니… 법망 피해 ‘옆집 재취업’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3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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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는 官피아]개정 공직자윤리법 시행 1년
4급이상 82명이 산하기관 재취업

퇴직 공무원의 취업 제한 기준을 강화한 개정 공직자윤리법은 시행 초기부터 국민적 공감을 얻었다. 유관 기관이나 민간단체 곳곳에 포진한 고위 관료 출신들이 불러온 구태가 세월호 참사 때 여실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헌법이 보장한 ‘직업 선택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는 반론도 나왔다. 하지만 전관예우 등 한국 사회에 뿌리 깊이 박힌 폐단이 줄어들 것이라는 기대가 더 컸다.

그러나 시행 1년이 지나면서 새로운 법이 내세운 취지와 현실의 괴리는 오히려 커져만 가고 있다. 강화된 법망을 피하기 위해 각종 꼼수를 동원해 재취업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관피아’를 원하는 기업이나 단체의 수요가 줄지 않은 상황에서 재취업 제한만 앞세운 단순한 규제가 한계에 부딪힌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 ‘옆집 취업형’에 ‘재수형’까지


동아일보는 지난해 3월부터 올 1월까지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의 퇴직 공직자 취업심사 결과를 전수 분석했다. 이 중 4급 이상 간부로 일하다 정부 산하 공공기관이나 관련 협회 등에 취업한 퇴직 관료는 82명. 국토교통부 출신이 10명으로 가장 많았다. 농림축산식품부(9명), 산업통상자원부 환경부 금융감독원(이상 6명) 출신이 뒤를 이었다. 세월호 사건 당시 이른바 ‘해피아(해양수산부+마피아)’로 불렸던 해양수산부 출신도 5명이나 됐다.

개정 공직자윤리법에 따르면 2급 이상 고위공무원은 퇴직 전 5년간 소속 부처 업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기관에 퇴직 후 3년간 취업할 수 없다. 종전에는 2년이었다. 취업 제한 대상 기관에 공기업과 유관 단체 등도 새로 포함됐다.

하지만 ‘관피아 방지법’을 피하는 방식도 진화하고 있다. 퇴직 전 소속 조직의 업무와 관련성이 없거나 적은 곳으로 재취업하는 ‘옆집 취업형’도 그중 하나다. 올 1월 동서발전 사장으로 재취업한 김용진 사장은 발전산업과 전혀 관련이 없는 기획재정부 출신이다. 지난해 9월 취임한 김준호 금융투자협회 자율규제위원장 역시 금융 분야와 관련이 없는 미래창조과학부 실장과 우정사업본부장을 지냈다. 겉으로만 봐서는 직무 관련성이 없어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민간 전문가 대신 전문성이 없는 퇴직 공무원을 영입한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관가(官街)에서는 개정 공직자윤리법이 낳은 기형적 현상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한 정부 유관 기관 관계자는 “기수 문화가 공고한 공직사회에서 법망을 피하며 서로의 자리를 챙겨주려는 것 아니겠냐”고 해석했다. 하지만 당사자들의 반론도 만만찮다. 산하 협회에 재취업한 고위공무원 출신 인사는 “심사에서 법적으로 문제없다고 결론 났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3, 4급 출신 퇴직자의 경우 소속 부서를 피해 가며 요직을 나눠 가지는 게 일상이 됐다. 가령 5년간 주택 관련 업무를 맡지 않았던 국토부 4급 퇴직자가 한국주택협회로 가는 식이다. 3급 이하 공무원의 경우 퇴직 전 소속 부처가 아닌 부서의 업무 관련성을 심사하는 기준을 피한 것이다.

취업에 성공할 때까지 계속 취업 심사에 도전하는 ‘재수형’도 있다. 방송통신위원회 고위공무원 출신 인사는 지난해 5월 한국정보통신진흥협회 상근부회장 재취업 심사에 떨어졌다. 하지만 두 달 후인 7월 다시 한국통신사업자연합회 상근부회장 자리로 가기 위한 심사를 받고 승인을 얻어냈다. 한국도로협회 상임부회장 직위는 각기 다른 국토부 4급 출신 3명이 3월과 5월, 11월 등 세 번의 심사 끝에 재취업에 성공했다. 이때까지 해당 자리는 공석으로 방치됐다. 전 국토부 고위공무원은 건설공제조합 이사장으로 내정됐지만 노조가 관피아라며 반발하자 대한건설정책연구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협회장이나 기관장이 아닌 ‘2인자’ 자리로 취업하는 ‘그림자형’도 부쩍 늘었다. 이는 법보다 여론을 의식한 행보로 보인다. 유관 기관 및 단체에 재취업한 전직 4급 이상 공무원 82명 중 63명이 장(長)이 아닌 부회장이나 본부장, 전무 등의 직위로 옮겼다. 기존에는 공직자가 맡았던 협회장을 민간 출신 전문가로 선출해 여론을 피하고 나중에 퇴직 공무원을 핵심 보직에 앉히는 것이다.

○ ‘면죄부’ 전락한 관피아 방지법

공직자윤리위는 강화된 공직자윤리법에 따라 매달 퇴직 공무원의 취업 심사 신청을 받아 가부 결정을 내린다. 그러나 법 시행 1년을 맞으면서 공직사회에는 ‘어떻게든 취업 심사만 통과하면 된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한 정부부처 관계자는 “공직자윤리법 개정 이전에는 관피아라는 비판을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며 “하지만 법 개정 이후 요건만 충족하면 관피아가 아니라며 오히려 떳떳해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공직자의 취업을 제한하는 방식만으로는 관피아 양산을 막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힘 있는’ 전직 공무원을 모셔야 거미줄처럼 얽힌 규제를 뚫고 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태윤 한양대 행정학과 교수는 “유관 기관이나 협회처럼 반관반민(半官半民)의 영역이 있는 한 관피아 문제는 사라질 수 없다”며 “사회가 공공부문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퇴직 공직자의 재취업 이후 행위를 규제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진재구 청주대 행정학과 교수는 “미국의 경우 유관 기관에 재취업한 퇴직 공직자가 전 소속 부처에 전화를 거는 것까지 법으로 규제한다”며 “이런 ‘행위 규제’를 통해 관피아의 수요를 줄이는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황태호 taeho@donga.com·송충현 기자
#관피아#공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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