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가 꽉 막힌 남북관계를 주도적으로 관리한다는 차원에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장례식 후 내년 상반기 정식으로 등장할 것으로 예상되는 ‘김정은 체제’를 인정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대통령은 22일 청와대에서 여야 정당대표를 만나 “(며칠 동안 정부가) 취한 조치들은 북한을 적대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북한에 보이기 위함이고 북한도 이 정도까지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북한 사회가 안정되면 이후 남북관계는 얼마든지 유연하게 할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기자들과 만나 천안함 및 연평도 도발의 책임 소재와 관련해 “김정일이 최종 책임자다”고 말했다. 그는 “최종 책임자인 김정일은 죽었지만, 김정은이 얼마나 책임을 져야 할지는 확실한 정보가 없어 판단하기 어렵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는 명확하게 김정은에게 책임이 없다고 말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 정부가 요구해온 천안함 연평도 사건에 대한 사과 문제에서 김정일과 김정은을 구분해 설명한 것이다. 다시 말해 김정일이 사망함으로써 천안함 연평도 사건 사과 문제에서 유연한 태도를 보일 수 있음을 시사한 것. 이 관계자는 “북한이 어떤 남북관계를 원하느냐, 비핵화에 대해 어떤 입장을 정하고 나오느냐에 따라 우리가 대응할 수 있는 옵션이 넓어질 것이다. 지금은 ‘관망 모드’다”고 말했다.
청와대 참모들은 이 대통령이 ‘김정은 체제’가 출범할 2012년에 한반도의 역사가 새로 쓰일 것이란 점에서 민족의 장래를 위한 밑그림을 그리지 못하면 큰 책임을 망각하는 것이란 의무감을 갖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 MB “정부 조치, 北적대시 않는다는 것 보여줘” ▼
이에 따라 ‘김정은 체제’를 부인할 게 아니라 현실로 받아들이면서 남북관계의 돌파구를 찾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아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김정은 체제가 부자손(父子孫) 3대 세습, 주민의 굶주림, 폭압정치 때문에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현 상황의 남북관계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인정이 불가피하다는 의견이 많다”고 말했다.
청와대 내부의 이런 기류는 핵무기 개발, 천안함 폭침 및 연평도 포격 등 북한의 무력 도발행위를 단호히 규탄해 온 그동안의 원칙을 훼손시킨다는 보수 지지층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형성된 것이다.
한 참모는 “북한의 변화를 도모할 새로운 창이 열린 지금 타이밍을 놓친다면 ‘더 큰 손실’이라는 생각에 이 대통령이 끌리고 있다”며 “실제 청와대 내엔 보수층의 비판을 받게 되겠지만 피해가지 않겠다는 용기가 필요한 때가 됐다는 공감대가 있다”고 말했다.
다만 외교안보 핵심 관계자는 “유연성이 필요한 국면은 맞았지만 아직 북한의 태도를 엿볼 단서가 없어 방향은 최종적으로 정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북한의 신년사(1월), 김정일 탄생 70년(2월), 김일성 탄생 100년(4월)을 통해 북한이 ‘포스트 김정일’ 체제의 구상을 어떻게 보여주느냐가 관건이라는 설명이다. 일단 이 대통령이 신년 연설을 한다면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의 유연한 대북인식이 비중 있게 다뤄질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청와대는 남은 10일 안팎의 기간에 북한 상황을 면밀히 점검하면서 정책 변화의 틀을 잡아갈 것으로 보인다.
한편 청와대는 김정일 사망 이후 진행한 토론을 통해 ‘안보위기를 정치에 이용하지 않는다’는 원칙도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