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노믹스’ 과감하게 추진…벤처 활성화-자본시장 개방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8월 19일 02시 56분



금 모으기1997년 말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아래서 당선된 김대중 전 대통령은 당선 직후부터 경제위기 극복에 매달려야 했다. 김수환 추기경과 송월주 스님 등 종교계 대표와 시민단체 대표들이 1998년 ‘외채상환 금 모으기 범국민운동’에 참여해 금을 기탁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금 모으기
1997년 말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아래서 당선된 김대중 전 대통령은 당선 직후부터 경제위기 극복에 매달려야 했다. 김수환 추기경과 송월주 스님 등 종교계 대표와 시민단체 대표들이 1998년 ‘외채상환 금 모으기 범국민운동’에 참여해 금을 기탁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금융-기업 등 4대 개혁… ‘전투적 노사문화’ 여전히 짐
카드 발급제한 완화 등 부양책 후유증으로 ‘거품’ 홍역

‘외환위기 극복, 금융 구조개혁, 공공부문 개혁, 정보통신산업 육성.’
김대중(DJ) 정부가 노무현 정부에 정권을 넘기기 약 한 달 전인 2003년 1월 17일. 국무총리실 산하 정책평가위원회는 청와대에서 ‘국민의 정부 5년 정책평가보고회’를 열어 김대중 정부가 집권 5년 동안 경제 분야에서 이룬 성과를 이렇게 요약했다. 당시 일각에선 ‘자화자찬’이라는 비판이 제기됐지만 많은 사람에게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국 경제를 외환위기에서 탈출시킨 통치자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1999년 벤처기업 육성, 2000년 부동산 규제 완화, 2001년 신용카드 발급제한 완화 등 경기부양을 위해 잇달아 도입했던 정책은 버블(거품)과 투기, 신용불량자 양산이라는 부작용을 낳았다.
○외환위기 극복…구조개혁은 미흡
1997년 말 국가부도의 위기 속에서 39억 달러까지 쪼그라들었던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김 전 대통령이 취임한 1998년부터 수출 확대에 힘입어 빠르게 증가해 재임 마지막 해인 2002년 말에는 1214억 달러로 불어났다. 외환위기 여파로 1998년 ―6.9%까지 추락했던 경제성장률도 1999년 9.5%, 2000년 8.5%, 2001년 4.0%, 2002년 7.2% 등으로 견실한 상승세를 이어갔다.
당시 김대중 정부가 외환위기 조기 극복을 위해 선택한 것은 강도 높은 구조조정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취임 직후 국제통화기금(IMF)의 ‘처방’에 맞춰 금융 기업 노동 공공 등 4대 부문 개혁에 착수했다. 이 중에서도 방만한 차입경영과 문어발식 확장경영으로 외환위기를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은 재벌 그룹이 구조조정의 1차 타깃이 됐다. 정부는 만성적인 공급과잉을 해소하고 기업의 국제경쟁력을 키운다는 명분으로 대기업 간 유사 또는 중복 사업을 통폐합하는 ‘빅딜’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빅딜의 후유증은 컸다. 정부 주도의 강제적인 구조조정에 대한 해당 대기업의 반발이 거센 것은 물론 DJ노믹스의 한 축을 이루는 시장경제의 기본 원리마저 무시한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빅딜의 산물인 하이닉스반도체는 상당 기간 경영부실로 고전했다.
다른 부문 개혁도 의도한 효과를 내지 못했다. 특히 노동개혁은 집권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흐지부지되고 ‘강성 노조’와 ‘쇠파이프’로 상징되는 전투적인 노사문화의 이미지를 벗겨내지 못해 한국 경제의 도약에 짐이 되고 있다. 공공개혁 역시 포항제철(현 포스코)을 비롯한 일부 공기업의 민영화를 제외하고는 뚜렷한 실적이 없어 공공부문의 비대화를 막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본부장은 “김 전 대통령은 외환위기가 왔을 때 평소 지론이던 ‘서민경제’에 얽매이지 않고 과감한 개혁 개방정책을 구사해 위기 극복을 이끌었다”며 “빅딜을 포함한 사업 구조조정이 시장논리가 아니라 정치논리로 이뤄졌다는 비판이 있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개방과 규제개혁…국부유출 논란도
시장 개방은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선택한 또 다른 돌파구였다. 특히 국내 자본시장을 과감히 개방한 것은 김 전 대통령의 공(功)이면서 과(過)로도 평가된다. 그는 1998년 자본자유화와 외국인 투자유치를 명분으로 증권거래업을 포함한 21개 금융업종을 외국인에게 전면 개방하고 외국인 주식투자 한도를 철폐했다. 외국자본이 급속히 유입되면서 코스피는 1997년 말 376에서 1999년 말 1,028로 치솟았다.
하지만 글로벌 스탠더드 열풍 속에서 지나치게 외자 유치를 강조해 국내 은행산업의 주도권을 외국 자본에 넘겨준 것은 시행착오로 꼽힌다. 뉴브리지캐피털에 팔린 제일은행(이후 스탠더드차터드은행이 인수), 칼라일펀드로 넘어갔던 한미은행(이후 씨티그룹이 인수) 등의 사례는 국부(國富) 유출 논란으로 번졌다.
규제개혁의 중요성을 환기시킨 것은 빼놓을 수 없는 성과다. 1999년 1월 현재 1만362건이던 규제 총수는 2년 뒤인 2001년 1월 6910건으로 줄었다. 다만 집권 후반기로 갈수록 규제개혁에 대한 의지가 약해지고 ‘경제력 집중을 억제해야 한다’는 논리로 대기업 규제를 강화하면서 규제 총수는 2003년 1월 7541건으로 다시 늘었다. 특히 이때 부활시킨 출자총액제한제도는 기업의 신규 투자를 가로막아 미래의 성장동력을 훼손시킨다는 비판을 받다가 이명박 정부에 들어서야 폐지됐다.
김 전 대통령의 경제철학은 1980년대 중반 미국 망명기간에 쓴 ‘대중경제론’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관(官) 주도에서 민간 주도의 경제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며 정부의 시장개입은 공정경쟁 유도, 소득 재분배, 시장실패의 교정 등 세 가지에 국한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 경제정책 수립에 참여했던 한 고위 공무원은 “임기 초반 위기 극복을 위해 시장 친화적 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고 이 과정에서 일부 지지층의 반발도 있었다”며 “임기 후반으로 갈수록 민주주의와 복지, 분배에 무게를 두다 보니 시장 활동을 위축시키는 정책이 나오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차지완 기자 cha@donga.com
박형준 기자 lovesong@donga.com
▼초고속통신망 구축해 IT강국 업그레이드▼
■ ‘IT전도사’ DJ
‘박정희 전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를 깔아 산업화를 이뤘다면 김대중 전 대통령은 초고속정보통신망을 구축해 지식정보화를 앞당겼다.’
김 전 대통령의 경제 분야 업적 중 대표적으로 꼽히는 것이 한국을 정보기술(IT) 강국으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단기간에 IT 강국으로 만든 이면에는 벤처 거품과 이에 따른 주가 폭락이라는 그늘도 남아 있다.
그는 1998년 대통령 취임사에서 “세계에서 컴퓨터를 가장 잘 쓰는 나라로 만들어 정보대국의 토대를 튼튼히 하겠다”며 IT 강국 의지를 천명했다. 이런 뜻은 집권 기간 이룬 각종 수치로 입증됐다.
김대중 정부 첫해인 1998년 1만4000명에 불과하던 초고속인터넷 가입자는 집권 마지막 해인 2002년 1040만 명으로 700배 이상 급증했다. 한국통신이 1994년 상용 인터넷서비스를 처음 시작하면서 “10년 안에 인터넷이 한국을 바꿀 것”이라고 한 호언장담이 무색하게 훨씬 짧은 기간에 세계 최고의 정보통신 강국으로 키워낸 것.
국내 IT산업 생산도 1998년 76조 원에서 2002년 189조 원으로 2배 이상 늘어났다. 김 전 대통령은 IT 붐을 통해 벤처기업 육성에도 적극 나섰다. 집권 기간 △벤처기업 최소자본요건 완화 △1조 원 규모의 모태펀드 운영 △벤처투자조합 출자조건 대폭 완화 △창업 2년 내 벤처에 대한 조세 감면 등 다양한 벤처기업 육성 정책을 내놓았다.
하지만 당시의 벤처정책은 단기성과에 급급해 양적인 성장에 치우쳤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실제 1999년 말에서 2001년까지 ‘묻지마 벤처투자’ 열풍이 불면서 IT 벤처기업들의 주가가 폭등했고 벤처 거품이 형성됐다. IT 정책도 부처 간 경쟁으로 여기저기에서 벤처 육성책을 내놓으면서 상당한 혼선이 빚어지기도 했다.
장원재 기자 peacechao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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