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성호]대통령기록물이 길거리 헤매야 하나

  • 입력 2008년 7월 21일 02시 52분


19일 0시 25분경.

전조등을 켠 차량 3대가 어둠을 뚫고 경기 성남시 수정구 시흥동 대통령기록관에 도착했다. 5시간 전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의 노무현 전 대통령 사저에서 떠난 차량들이다. 차량에는 노 전 대통령 재임 시절 기록물이 담긴 하드디스크 14개와 복사본 14개가 실려 있었다. 하드디스크는 사과상자 절반 크기의 알루미늄 박스에, 복사본 14개는 여행용 하드케이스 가방에 담겨 있었다. 국가기밀이나 다름없는 대통령 기록물이 ‘짐짝’처럼 차량에 실린 채, 무려 400km가 넘는 거리를 달려온 것이다.

일반적으로 대통령 기록물 같은 국가 중요 기록물의 운반에는 무진동 차 등 특수차량이 투입된다. 또 일정 규모 이상의 경호 인력과 차량이 지원된다.

그러나 이날 봉하마을을 떠난 차량 행렬은 경찰차 1대의 호송만 받았을 뿐이다.

이에 앞서 18일 오후 국가기록원 관계자들은 기록물 회수를 위해 봉하마을을 찾았다. 국가기록원은 서버와 하드디스크 모두 돌려줄 것을 요청했다. 또 운반 과정에서 혹시 발생할지 모를 훼손 가능성에 대비해 추가 복사도 함께 요구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 측은 “서버는 사인(私人)의 것이기 때문에 반환할 수 없다”며 내놓지 않았다. 추가 복사 요구도 거부했다. 급기야 노 전 대통령 측은 오후 7시 반 “대통령기록관을 향해 떠난다”며 일방적으로 통고한 뒤 하드디스크와 데이터 복사본을 직접 들고 나섰다.

노 전 대통령 측의 김경수 비서관은 “만약 국가기록원이 기록물을 받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에 “이 기록물의 관리 주체는 국가기록원”이라고 말했다. 이어 “시한에 맞춰 가져온 기록물의 수령을 거부하면 이것은 곧 직무유기”라고 주장했다.

대통령 기록물의 관리는 국가기록원의 고유한 책무라고 말하면서 정작 국가기록원이 요구한 반환 규정은 거부하는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직무유기”라는 김 비서관의 으름장은 마치 대통령 기록물을 손에 쥐고 국가기록원을 ‘협박’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국가기록원이 ‘임시 수령’을 결정하지 않았다면 대통령 기록물이 길거리를 떠도는 ‘미아’처럼 길가에 방치되는 한심한 상황이 연출될 뻔했다.

이날 비상근무에 나섰던 대통령기록관의 한 60대 경비원은 “우리야 뭐 아는 것이 있나”라면서도 “설마 진짜로 올 줄은 몰랐네” 하고 혀를 찼다.

이성호 사회부 stars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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