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정부 출범3개월]<5·끝>국정 혼란 ‘보수의 위기’로

  • 입력 2008년 5월 28일 03시 01분


정권 중심 되찾은 보수, 국정 중심 못잡고 ‘헛손질’

#1 한나라당의 ‘386’ 당직자 A 씨는 최근 대학 동창 모임에 나갔다가 지난해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했다는 친구들의 질문 세례를 받고 적잖게 당황했다. 친구들은 “너희 보수정권이 노무현 정권보다 나은 게 뭐냐. 잘한 게 있으면 대 봐라”라고 몰아붙였다.

#2 이 대통령의 핵심 측근인 청와대 관계자 B 씨는 최근 이 대통령의 22일 대국민 담화 후 그날 배석한 장관들과 청와대 참모들을 거칠게 비판했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되도록 어떻게 책임지겠다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느냐. 이러니 보수세력이 능력도 별로 없는 데다 뻔뻔하다는 말까지 듣는 것이다.”

새 정부 출범 후 3개월간의 각종 난맥상과 전례를 찾기 힘든 20%대의 낮은 국정운영 지지율은 단지 이명박 정부의 문제를 넘어 10년 만에 한국의 중심부를 장악한 보수세력 전반의 위기로 확산되고 있다는 진단이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지난해 대선에서 한국 보수세력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을 ‘무능하고 편 가르기만 한 아마추어 좌파 정부’로 규정했고, 경제 살리기 등을 내세워 주류로 재부상했다. 그러나 2008년 5월 한국 보수세력은 ‘준비 안 된 아마추어 보수정권’이란 비판을 받으며 이전 정권의 실패를 부분적으로 재연하고 있다. “일 하나는 잘할 것”이라며 보수세력을 지지한 국민은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 원인은

10년 공백-빈약해진 인재풀 극복못해

‘압승’에 취해 국민 마음 읽는데 소홀

○ 10년 실권(失權)의 그림자

이 대통령을 정점으로 하는 한국 보수세력이 최근 곤욕을 치르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우선 1998년부터 2007년까지 정권을 놓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 기간은 인터넷 등 정보기술(IT)의 급속한 발달로 국정 운영의 기조와 방식이 대대적으로 바뀌었는데 한나라당과 보수세력이 마지막으로 국정 운영에 참여한 것은 1998년 2월이었다.

숭실대 강원택(정치학) 교수는 “보수세력이 당정협의라는 상징적인 국정운영체에 다시 참여한 게 10년 만이다. 그만큼 한국을 운영하는 거버넌스(Governance)에서 오래 소외되어 있다 보니 국가 경영의 노하우를 잊어버렸거나 감각을 계발하지 못했다”고 진단했다.

이 기간에 극도로 빈약해진 보수 인재풀과도 무관치 않다. 여권의 관계자들은 “별 흠 없이 국정 운영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고 고백하고 있다. 박미석 전 대통령사회정책수석비서관의 후임을 27일째 못 찾고 있는 게 대표적인 예다. 요즘 청와대 사람들은 출입기자들을 보면 “어디 좋은 사회정책수석감 없느냐”고 묻는 게 일상이 됐다.

쇠고기 논란을 거치며 여권 일각에서 제기된 인적 쇄신론에 대해 이 대통령이 부정적 견해를 보인 배경 중 하나도 빈곤한 인재풀이라고 한다. 이 대통령의 핵심 측근은 “바꾸려고 해도 사람이 없다. 새 사람을 뽑아 또 사고 나면 그땐 끝장이다”라고 했다.

○ 530만 표 압승의 함정

이 대통령이 지난해 대선에서 압승한 것은 좌파정권에 대한 염증의 반작용적 측면이 적지 않았는데도 새 정부는 530만 표 차의 대승이 보수세력이 추구하려는 모든 정책을 국민이 ‘공인’한 것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보이고 있다.

대운하 논란이 대표적인 것이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시절에는 연내 추진설 등이 불거진 뒤 지지율 하락과 함께 대운하에 대한 지지도 떨어졌지만 청와대는 “국민 의견을 수렴한 뒤 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 대통령은 21일 대구시·경상북도 업무보고에서 “(물길의 각 구간을) 잇고 하는 것은 국민이 불안해하니까 뒤로 미루자”고 밝혔지만 오히려 정책의 불투명성을 가중시킨 측면이 없지 않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정부 출범 초 미국발 금융위기 등으로 인한 환율 상승(원화가치 하락)에 대한 정부의 초기 ‘자유방임식’ 대처는 지나치게 성장에만 매달리는 것 아니냐는 시장의 지적을 받았다.

여권에서는 조만간 정부가 본격화할 공기업 민영화 등 공공부문 개혁이 이 대통령 임기 초반 주요 정책 추진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계속 얻을 수 있는지를 가르는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주요 공약 중 빨리 하나라도 구체화해야 한다”는 성과주의에 빠져 강성 노조가 포진하고 있는 공기업 민영화에 입체적 대응을 소홀히 할 경우 예기치 않은 보혁-노사 갈등을 증폭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강원택 교수는 “보수세력이 아직도 대선 승리에 도취돼 있어서는 곤란하다. 대선 후에는 아무리 잘해도 내리막길만 남아 있는 만큼 섬세한 정책 대응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 시급한 체질 개선

쇠고기 논란과 촛불집회에 대한 정권 차원의 단선적 이해와 대응은 아직 한국의 집권 보수세력의 ‘마인드 시계’가 2008년 5월 이전에 있다는 비판을 받기에 충분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부는 쇠고기 논란 대처 과정에서 주로 인터넷 괴담으로만 치부했고 정작 이 논란을 감싸고 있는 다층적인 정치·사회적 환경을 고려한 담론을 생산해내지 못했다. 특히 젊은층의 변화된 커뮤니케이션 방식과 이를 통한 여론 및 의제 설정 과정을 간과했다는 지적이다.

최근 인터넷에 유포되고 있는 ‘뼈의 최후통첩’이라는 패러디 동영상이 있다. 미국 액션 영화 ‘본(Bourne)’ 시리즈 영상을 편집해 쇠고기 논란 관련 주장을 더빙한 것인데, 이를 본 청와대 관계자는 “팩트의 사실 여부를 떠나 이런 식으로 소통한다는 것 자체가 충격”이라고 말했다.

특유의 ‘안일한 웰빙 의식’을 벗어던지고 제대로 국정을 수행해내겠다는 보수층의 사고 전환이 어느 때보다 아쉽다는 지적도 있다. 장관과 대통령수석비서관의 상당수가 교수, 변호사이다 보니 “언제든 내 자리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안일함이 여전하다는 것. 한나라당의 한 재선 의원은 “무엇인가를 해내겠다는 치열함, 정권 성공이라는 가치에 대한 충성심 등은 좌파정권에서 오히려 배워야 할 덕목”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여권 내에서는 지난해 대선에서 새 정부 탄생을 지지한 보수세력들이 최근 쇠고기 논란 등을 거치며 제대로 힘을 보태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아쉬워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새 정부에서 어느 정도 ‘지분’이 있다는 보수성향의 시민세력들이 촛불집회 등에 맞서는 정치적 행동은 아니더라도 아직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면서 여론 시장의 균형추가 맞지 않을 수 있다는 것. 고려대 이내영(정치학) 교수는 “최근 상황에 대한 1차적 책임은 정부에 있지만 국민도 인내를 갖고 새 정부가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을 배려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승헌 기자 ddr@donga.com


▲ 영상 취재 : 서중석 동아닷컴 기자

■ 해법은

검증된 인재 발굴 汎보수 공조 필요

정책의 일관성 높여 신뢰 회복해야

보수 집권층이 지금이라도 ‘준비 안 된 보수’라는 인식을 떨쳐내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준비를 해야 한다는 지적이 중론이다.

한나라당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인재 풀을 보강하기 위해 정무와 실적이 검증된 의원을 중점 육성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임태희 신임 정책위의장은 “보통 초선들이 맡던 정책조정위원장을 17대 국회에서 재선 의원으로 전원 편성한 것은 이들이 조만간 가동될 차관급 당정회의 등을 통해 실력을 쌓아 언제든지 해당 분야의 장관으로 충원될 수 있도록 하는 게 주목적”이라고 말했다.

정부 내부의 커뮤니케이션을 강화해 “내부 목소리도 조율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국민을 설득하느냐”는 비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지적도 많다. 27일부터 본격 가동된 국정과제전략회의는 이러한 고민의 산물.

정책의 신뢰성 확보도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연세대 김호기(사회학) 교수는 “옳고 그름을 떠나 하겠다는 것인지, 안 하겠다는 것인지를 분명히 해 정책의 일관성을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정치컨설팅 전문업체 ‘민기획’의 박성민 대표는 “유권자는 앞으로 갈수록 ‘정치 소비자’화할 것이며 이명박 정부는 어느 정권보다 이들의 수요와 요구를 기민하게 파악하고 대처해야만 제대로 국정 운영 시스템을 작동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보수 성향 시민 세력의 건설적인 역할론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최근 쇠고기 논란은 왜곡된 정보가 인터넷에 유통되면서 필요 이상으로 확산된 측면이 있는데 선거 때는 그렇게 자주 들리던 보수 세력의 목소리가 최근에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여권에서는 보수 세력의 목소리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기 위해 시민사회의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길진균 기자 le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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