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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7년 2월 16일 15시 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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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최대의 명절인 ‘설’이다. 저마다 설레는 가슴으로 고향 길을 재촉한다. 그러나 며느리들에게 명절은 노동절로 통한다. 제사상 음식 만들랴 칭얼대는 자녀 챙기랴 제대로 쉴 시간이 없다. 미혼 여성도 시달리기는 마찬가지. 오랜만에 만난 친지들의 결혼 독촉에 괴롭다. 그렇다면 여성 정치인들은 어떤 설을 보낼까. 기혼·신혼·미혼의 여성 정치인들을 차례로 만나 설을 맞은 그들의 속내를 들어봤다. -편집자-
“처음엔 힘들어서 남몰래 눈물도 많이 흘렸어요.”
대권후보로 분류되는 민주노동당 심상정 의원을 만나기 위해 16일 국회 의원회관을 찾았다. 심 의원은 결혼한 지 올해로 17년째다. 그는 7년간의 열애 끝에 지금의 남편과 결혼했다. 슬하에 중학교 2학년인 아들이 한 명 있다.
심 의원도 정치인이기 이전에 한 가정의 주부이자 시부모를 모시는 며느리다. 그는 신혼 시절 명절을 맞아 시댁을 찾을 때면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고 털어놨다.
“결혼 전에는 명절 때면 얻어먹기만 했는데, 결혼하고 나니까 며느리로서 가사 노동의 중심에 서게 되더군요. 초창기엔 남몰래 눈물도 많이 흘렸어요. 제사 음식을 전혀 할 줄 모르는데 감당하려니까 너무 힘들어서요. 지금이야 숙달돼서 괜찮지만….”
말끝을 흐린다. 지금도 당시를 회고하면 마음이 아픈가보다. 그는 일도 힘들었지만 텔레비전을 보며 웃고 떠드는 남편이 더 야속했단다.
“처음 몇 년간은 시댁에 다녀올 때마다 남편과 말다툼을 했어요. 너무 불공평하더라고요. 그래서 남편에게 ‘남자들도 가만히 있지 말고 집안일을 도와야 하는 거 아니냐’고 따졌죠.”
그런 다툼은 3~4년이나 지속됐다. 심 의원은 가부장적인 시댁 분위기를 바꾸는 데 며느리들이 일심동체가 돼 일으킨 ‘모반(?)’이 주효했다고 했다.
“한번은 동서들과 상의를 했어요. 차례 지내고 나면 먹을 거 싸서 밖에 나가자고요. 일단 대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들어올 때까지 집안일은 남자들이 하도록 두자고요.”
그는 “그 일이 있고난 다음부터 역할 분담에 대한 공론화가 이뤄졌고, 시댁 남자들이 변하기 시작했다”며 웃음보를 터뜨렸다. 통쾌(?)한 반전이 지금 생각해도 재미있단다.
그날 이후부터 심 의원은 시댁에서 감독관 역할을 맡게 됐다.
“명절 때 보면 어느 가정이나 남자들은 아무 일도 안 하고 텔레비전이나 보며 쉬잖아요. 저희 시댁도 며느리들만 죽어라 고생하죠. 그래서 남편이나 서방님, 아주버님들께 상도 들고 가도록 하고, 가사에 동참하도록 주문하는 역할을 많이 해요.”
“정계 입문 뒤 며느리 노릇 잘못해 형님과 동서들에게 죄송”
화제는 이번 설 연휴 기간의 활동 계획과 여성 정치인으로서 겪는 고충으로 이어졌다.
심 의원은 설 전날은 시댁에서 음식을 만들고, 설 당일은 큰 시댁에서 차례를 지낸다. 명절 때면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친척들이 큰 시댁으로 모인다. 그 인원만도 30명이 넘는다. 친정에는 설날 저녁에 간다.
그의 큰 시댁은 서울 강동구 암사동에 있고, 친정은 경기도 안양에 있다. 서울과 수도권에 있어 비교적 이동하기에 수월한 편이다.
심 의원은 정계에 입문한 뒤부터는 평소 며느리 역할을 제대로 못했다. 그래서 명절만이라도 며느리 노릇을 충실히 하기 위해 시댁 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자진해서 부엌을 찾는단다.
“저는 공무가 바쁘다는 핑계로 며느리들 가운데 일을 제일 적게 해요. 형님이나 동서들에게 늘 미안하죠. 그래서 짧은 시간이지만 시댁에 들어가는 순간 팔을 걷어붙이고 부엌으로 향합니다. 시댁을 나설 때까지 열심히 일하죠. 그동안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아야겠다는 마음에서요.”
심 의원 시댁 며느리들도 여느 가정처럼 모이면 수다꽃을 피운다. 화제도 비슷하다.
“자녀 교육과 관련한 이야기를 많이 나눠요. 대학은 어디 가야 하는지, 공부는 어떻게 시키는지….”
“헌신적으로 뒷받침해주는 아들과 남편에게 고마워요”
심 의원은 당내 대선후보 빅3로 거론되는 만큼 설이라고 해서 집안일에만 매달릴 수는 없는 입장이다. 그는 “설 전날에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찾아 격려하고, 설날에도 오후에는 평택 대추리를 찾아 고생하시는 분들과 인사를 나눌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명절이건 평일이건 정치에 헌신할 수 있는 건 모두 가족 덕분이라고 했다.
“일하는 여성이 가정과 직장을 둘 다 챙기는 건 정말 힘들죠. 제가 정치인이 되고난 이후부터는 남편과 아들이 불가피하게 희생을 많이 해요. 아들하고는 일주일에 한 번밖에 같이 밥을 못 먹어요. 살림은 거의 95% 이상 남편이 담당해요. 헌신적으로 저를 뒷받침해주기 때문에 정치를 할 수 있는 겁니다. 안 그러면 감당 못하죠. 남편과 아들에게 정말 고맙죠.”
그는 시아버지의 격려도 빼놓을 수 없단다.
“시아버님께서 격려의 말씀을 많이 해주세요. ‘지금은 여성들이 지도자로 나서는 게 세계적인 대세다. 여자라고 전혀 꿀릴 게 없다. 내가 보기에 우리 둘째며느리는 아주 훌륭한 정치인이 될 거 같다’며 힘을 불어넣어주시죠. 그리고 남편에게는 제 뒷받침 잘해주라고 하세요.”
심 의원은 이제 어엿한 베테랑 며느리다. 그는 정치인을 떠나 우리 시대의 전형적인 며느리의 입장에서 며느리들의 고충을 이해하고 그들을 배려해줄 것을 당부했다.
“명절은 가족 모두에게 즐거운 날이 돼야 하잖아요. 명절 때면 고통을 많이 겪는 여성들이 즐겁게 명절을 보낼 수 있도록 가족이 나서서 가사를 분담해 줬으면 해요.”
김승훈 동아닷컴 기자 hu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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