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조치 판결’ 판사 실명 공개… 법조계 “마녀사냥식 여론재판”

  • 입력 2007년 1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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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1970년대 긴급조치 위반 사건을 판결한 판사들의 실명을 31일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과거사위 유한범 대외협력과장이 30일 이 같은 결정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박영대 기자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1970년대 긴급조치 위반 사건을 판결한 판사들의 실명을 31일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과거사위 유한범 대외협력과장이 30일 이 같은 결정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박영대 기자
‘긴급조치 위반 사건 판결 분석보고서’가 31일 예정대로 담당 판사의 실명이 명기된 채 공개된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과거사위·위원장 송기인)는 30일 오후 긴급 임시 전원위원회를 열고 “판사 이름을 비공개하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적인 일”이라며 이같이 결정했다.

▽“판사 이름은 이미 공개된 것”=이 보고서에는 1970년대 긴급조치 위반으로 기소된 589개 사건, 1412건의 판결에 대한 사건 번호와 개요가 담겨 있다. 또 당시 재판을 담당한 판사 492명의 실명이 포함돼 ‘과거사위가 여론재판을 하려 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명단에 포함된 판사 중 13명은 현직 대법관, 헌법재판소 재판관 등 고위직을 맡고 있다.

과거사위는 이날 배포한 보도자료에서 “법원공보 및 판결집, 대법원 홈페이지에 실린 수많은 판결에도 모두 판사 이름이 실려 있다”고 말했다. 과거사위는 이 보고서를 31일 대통령과 국회에 제출하기로 했으며 동시에 언론에도 공개할 예정이다.

명단 공개 문제가 불거진 후 30일 전원위원회에서 한 위원이 “긴급조치 시절의 판사 중 80% 이상이 자기 뜻에 반해 동원된 판사들이다. 이들도 피해자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이 같은 의견은 반영되지 않았다.

▽“집단적 마녀사냥”=긴급조치 위반 사건 판결을 내린 판사들의 실명 공개를 강행하기로 하자 법조계에서는 ‘마녀사냥식’ 여론재판을 우려하고 있다. 대법원은 물론 재야 법조계에서는 “아무리 의도가 순수하다 해도 이런 식으로 하면 또다시 반성해야 할 과거를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법조계에서는 판결문을 열람하면 일반인도 볼 수 있는 법관 이름을 별도 보고서 형식으로 정리해 공개하겠다고 한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분위기다. 게다가 당시 시대 상황에 대한 고려나 판결문 원문도 제대로 분석되지 않았는데 일부 언론을 통해 현직 법관들의 실명부터 공개된 과정을 의심하고 있다.

법원 고위 관계자는 “과거사 정리가 ‘법관의 이름’이 본질이 아니지 않으냐”며 “법관 개인이 살아온 삶을 총체적으로 평가하거나 판결을 분석도 하지 않은 채 매도하는 건 매우 위험하다”고 말했다. 그는 “정말 잘못된 판결을 했을 수 있으나 그렇다고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마녀사냥을 한다면 무슨 진실이 규명되고 화해가 이뤄질 수 있겠느냐”라고 반문했다.

현직에 남아 있는 몇몇 법관에게 불행했던 과거의 모든 책임을 지우려는 분위기에 대해서도 우려가 많았다.

한 부장판사는 “불행한 과거를 돌아볼 필요가 있음은 대다수 판사도 수긍한다”면서도 “그러나 과거 실정법하에서 이뤄진 판결에 대한 옥석구분 없이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게 정당한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검찰은 당시 사건을 수사하고 기소했던 검사들이 모두 현직을 떠났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긴장감이 덜했지만 “남의 일 같지 않다”는 반응도 많았다.

대한변호사협회 신현호 공보이사는 “여론몰이식으로 명단을 발표해 판사들이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에 빠지게 되면 법적 안정성을 해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화해냐, 분열이냐=당초 과거사위는 ‘진실 규명과 화해’를 내세워 과거사 정리 작업에 나섰지만 이번 일은 오히려 국론 분열을 부추길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도 있다.

대한변협은 논평을 통해 “과거 유신체제하에서 많은 인권 침해 사례가 발생했던 불행한 역사를 부인할 수는 없다”면서 “그러나 유신헌법에 의한 재판까지도 비난 대상으로 삼는 것은 또 다른 국론 분열을 초래할 위험이 크다”고 밝혔다.

변협은 이어 “과거의 진상 규명은 필요하지만 역사를 단절시키거나 국론을 분열시켜 미래를 향한 국가 발전을 저해하는 과거사 처리는 국민의 이름으로 자제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대법원은 일부 대법관 후보를 제청할 때 긴급조치 위반 사건 판결에 관여했던 점을 검토했다. 그러나 대법원 관계자는 “이용훈 대법원장이 많은 고민 끝에 이런 식으로 인적 청산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해서 제청한 것 아니겠나”라고 전했다.

이 대법원장은 취임 직후 과거사 정리 작업에 착수했다. 인적 청산 같은 방식 대신 대법원 판례 변경 등을 통해 과거 사법부의 잘못된 판결의 오류를 바로잡겠다는 것. 이후 대법원은 1972∼1987년 긴급조치법과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등의 판결문 6000여 건을 분석해 재심 대상을 분류하고 있다.

::긴급조치란::

제4공화국의 유신헌법(제53조)에 규정돼 있던 대통령의 특별권한. 유신헌법은 국가의 안전보장, 공공의 안녕 질서에 중대한 위협이 있어 신속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 대통령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시키는 긴급조치를 발동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1974년 1월 유신헌법에 대한 발언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은 1호가 선포된 것을 시작으로 1975년 5월 1∼7호(8호는 7호 해제 조치)를 집대성한 9호가 발령됐다. 긴급조치 9호는 1979년 12월까지 유지됐다.

긴급조치는 당시 언론 출판 집회 및 시위의 자유 등을 크게 제한했으며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국민을 탄압하는 도구로 활용됐다.

조용우 기자 woogija@donga.com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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