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6년 11월 21일 02시 56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김만복 국가정보원장 내정자의 발탁에 대한 서동만(현 상지대 교수) 전 국정원 기획조정실장의 평가다. 2003년 4월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정보관리실장(1급)→2004년 2월 국정원 기조실장(차관급)→2006년 4월 국정원 1차장→2006년 11월 국정원장 등 2급에서 장관급인 국정원장이 되는 데 불과 3년 6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에서의 초고속 승진으로 두드러지게 됐지만, 김 내정자는 기실 김대중(DJ) 정부 때도 ‘눈에 띄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 전현직 국정원 직원들의 얘기다.
국정원의 업무특성상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DJ 정부 초기인 1998년부터 2002년 세종연구소로 자리를 옮기기 전까지 대북전략국 대북전략1과장을 맡아 DJ와 임동원 전 국정원장이 지휘하는 대북정책의 실무를 챙겼다.
1998∼99년엔 남북한과 미국, 중국이 참여한 가운데 한반도 긴장완화와 평화체제 문제를 논의한 3∼6차 4자회담에 우리 측 대표로 참여했고, 2000년 6월에는 남북정상회담 준비를 위해 평양을 방문했다. 제1, 제3차 남북장관급회담 때엔 기획을, 이산가족 상봉 때는 실무준비를 맡았다. 이런 경력 때문에 국정원 일각에선 김 내정자가 DJ의 대북송금 문제와 관련한 책임을 피할 수 없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
그에게 시련이 닥친 것은 DJ 정권 말기였던 2002년. 그는 “그만두라”는 얘기와 다름없는 세종연구소 파견근무를 하게 됐다. 그가 재기하리라고 여기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세종연구소의 북한연구실장이던 이종석 통일부 장관을 만났고, 현 정부 출범과 함께 NSC에서 사무차장(이종석)-정보관리실장(김만복)으로 호흡을 맞췄다. 김 내정자가 ‘이종석 인맥’으로 분류되는 것은 이런 인연 때문이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1974년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에서 7급 공무원으로 공직을 시작한 김 내정자가 처음 배속된 곳은 서울대 학원담당정보팀. 긴급조치시대에 유신헌법을 반대하는 운동권을 담당하는 일이었다. 1978년 5·8시위를 주도해 옥살이를 한 서동만 전 기조실장은 “서울 관악경찰서에 연행됐을 때 김 내정자가 취조실로 찾아와 ‘다음 타자(시위주동자)가 누구인지만 귀띔해 달라’고 회유했다”고 밝힌 적이 있다.
김 내정자를 두고 일부에서는 “공복(公僕) 그 자체”란 긍정적 평가와 “늘 윗사람을 향해 안테나가 세워져 있는 사람”이란 부정적 평가가 엇갈린다.
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