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백형찬]문화예술 지자체, 濠 애들레이드처럼

  • 입력 2006년 6월 2일 03시 03분


이번 지방선거에서 많은 당선자가 제각기 자기 고장을 문화예술 도시로 만들겠다고 공약했다. 문화예술 정책을 약속해야 표를 얻는 세상이 된 것이다.

현재 전국의 웬만한 대도시에는 문화예술 전당이 하나씩은 다 있다. 엄청난 예산을 들여 만들었지만 수도권의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그냥 ‘전당’으로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문화예술 전당에서 열리는 클래식 공연에는 자리가 휑하니 비고, 체육관에서 열리는 전국노래자랑은 빽빽이 찬다. 이러한 현상에는 문화예술 소비자인 주민들의 의식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빈약한 프로그램 때문이다.

세계의 유서 깊은 문화예술 도시에는 주민들의 문화 향수력(享受力)이 뒷받침되고 있다. 호주가 자랑하는 애들레이드도 문화예술로 크게 성공을 거둔 도시 가운데 한 곳이다.

시드니에서 비행기를 타고 애들레이드로 향하는 하늘에서부터 문화예술은 시작된다. 호주 국내선 여객기 승객들에게 제공하는 기내식 식판 뚜껑에는 애들레이드에서 활동하는 젊은 작가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 그림 밑에는 항공사가 이들 작가를 자랑스럽게 지원해 주고 있다고 적혀 있다.

공항에 내리면 모든 자동차의 번호판에 ‘The Festival State(축제의 주)’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도심으로 들어서면 19세기 빅토리아식의 웅장한 건물들이 나란히 도열해 있다. 각 건물은 이 도시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다. 건물마다 붙어 있는 파란 녹이 낀 동판에는 누가 설계하고 공사했으며 어떤 목적으로 지어졌고 어떻게 사용됐는지 일목요연하게 적혀 있다. 애들레이드 타운홀에는 비틀스가 언제 이곳에서 공연했다는 기록도 붙어 있다. 즉 건물마다 이력서를 한 장씩 들고 서 있는 것이다.

도시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토런스 강에서도 이러한 독특한 기록을 읽을 수 있다. 강변 바닥 나무판에 붙어 있는 동판에는 이곳이 시드니 올림픽 조정경기 금메달리스트가 연습하던 곳이라는 표지와 함께 수상자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올림픽 금메달을 받으면 현수막을 걸고 카퍼레이드를 하며 야단법석을 떨지만 그 후에는 흔적도 남지 않는 우리와는 큰 차이가 있다.

기록은 시내 곳곳에 세워진 동상에서도 볼 수 있다. 도시 이름의 기원이 된 이탈리아의 왕후 아델라이데를 기억하기 위해 동상을 세우고, 아프리카 전쟁에서 용감히 싸우다 전사한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해 동상을 세운다. 예술조형물을 통해 애들레이드의 역사를 자랑하는 한편 미적 감수성도 드러내는 것이다.

대학도 도시와 협력해 도시를 아름답게 가꾸고 있다. 도시의 긴 벽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멀리서 보니 색색의 타일이 가득 붙어 있었다. 그러나 가까이 가서 보니 그것은 타일이 아니라 작은 장난감 자동차들이었다. 대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벽에 수만 개의 장난감 자동차를 붙여 콘크리트 벽에 표정을 불어넣은 것이다.

이렇듯 문화예술 도시는 작은 것에까지 관심을 가질 때 만들어진다. 웅장한 건물만 짓는다고 문화예술 도시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번 지방선거 당선자들이 어떻게 문화예술 도시로 꾸며 나갈지 자못 궁금하다. 또 럭셔리한 건물만 짓는 것은 아닐까?

백형찬 서울예술대 교수·교육행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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