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이다…침착해!” 불 켜려다 총알세례

  • 입력 2005년 6월 24일 03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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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 현장군 당국이 23일 총기난사 사건의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하며 공개한 현장 사진. 내무반 침상 위에 모포가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참사 현장
군 당국이 23일 총기난사 사건의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하며 공개한 현장 사진. 내무반 침상 위에 모포가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경기 연천군 최전방 감시소초(GP) 총기난사 사건은 선임병들의 질책을 견디지 못한 김동민 일병(22)의 내성적 성격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요약된다.

23일 군 당국이 발표한 최종 수사 결과와 동료 병사들의 진술로 사건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한다.

김 일병은 사고가 난 육군 28사단 530GP에 전입되기 전 1월 중순부터 3월 말까지 바로 옆 531GP에서 복무했다. 당시에도 김 일병은 정모 상병 등 2명의 선임병에게 멱살을 잡힌 채 “×새끼”라는 질책과 욕설을 들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전우에게 어찌 그럴수 있나" 분노…눈물…

이 사건을 계기로 김 일병은 5월 530GP로 옮겼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느리고 불손한 행동 때문에 김 일병에게는 “미쳤느냐”, “×새끼”라는 선임병들의 질책이 쏟아졌다.

사건 1주일 전인 13일에도 질책과 욕설을 들은 김 일병은 “소대원들을 모두 죽이겠다”고 결심했고 전 소대원을 몰살시키고 GP에 불을 지른 뒤 남방한계선 이남으로 도주해 은신한다는 계획까지 이미 서 있었다.

사건 당일인 19일 0시부터 초소 근무에 투입된 김 일병은 오전 2시 반 범행에 착수했다.

화장실에서 수류탄 안전핀을 뽑고 실탄을 장전한 김 일병은 조용히 내무실로 들어와 이모 상병을 향해 수류탄을 던진 뒤 급히 빠져나왔다.

곧 ‘꽝’ 하는 폭음과 함께 정전이 되면서 내무반은 피비린내 가득한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어둠 속에서 북한군의 도발로 여긴 병사들이 침낭을 뒤집어쓴 채 우왕좌왕하자 선임병들은 “침착, 침착해”, “비상이다, 불 켜”라고 외쳤다.

그때 김 일병은 상황실로 이동하다 체력단련실에서 나오던 소초장과 취사장의 조모 상병을 차례로 총을 쏴 살해했다. 조 상병에겐 확인사살까지 했다.

같은 시각 폭음에 놀라 상황실에서 복도로 나오던 신임 소초장은 김 일병의 총격을 받고 상황실로 다시 들어가 상부에 ‘적 침투’ 상황을 전파했다.

같은 시각 김 일병은 상황실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지만 격발이 안 되자 탄창을 갈아 끼운 뒤 내무반으로 다시 들어가 총기를 난사했고 이때 부상자 점검 등 사태 수습에 열중하던 상병들이 총탄을 집중적으로 맞고 쓰러졌다.

김 일병의 범행 시작 2, 3분 만에 GP는 쑥대밭으로 변했다. 오전 2시 45분 GP 옥상의 경계병을 해치우기 위해 옥상으로 올라갔지만 실탄이 다 떨어진 김 일병은 태연하게 초소로 복귀했다.

오전 2시 50분 신임 소초장은 자신에게 총격을 가한 범인이 전투복을 입었다는 기억을 되살려 집결한 부대원 중 전투복 차림의 5명을 골라내 손바닥의 화약 냄새를 맡았다.

하지만 증거가 발견되지 않자 이들을 별도로 구금한 뒤 정 상병이 총기가 뒤바뀐 김 일병을 집중 추궁했고, 이에 김 일병은 범행 일체를 실토한 뒤 포박됐다.

윤상호 기자 ysh1005@donga.com

▼“너희들 왔구나… 내 아들은 어디갔니”▼

“나야 나”
경기 연천군 최전방 감시소초(GP)에서 일어난 총기난사 사건의 생존 병사가 23일 경기 성남시 국군수도병원의 합동분향소를 찾아 군 생활을 함께했던 동료의 영정을 들고 흐느끼고 있다. 성남=사진공동취재단
“내 새끼들 왔느냐. 그런데 내 아들은 어디로 갔니….”

22일 오후 경기 성남시 분당구 국군수도병원 합동분향소. 연천군 최전방 감시소초(GP) 총기난사 현장에서 살아남은 부대원들이 먼저 간 전우들을 찾았다.

며칠 전까지 한 내무반에서 함께 생활하던 전우가 싸늘한 주검이 돼 누워 있는 영정 앞에 서서 이들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숙였다. 생사의 갈림길에 섰던 그날의 악몽과 충격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듯한 표정이었고 어깨는 축 처져 있었다.

고 김종명 중위의 후임 소대장인 이인성 중위의 인솔로 국화꽃 한 송이씩을 들고 묵념을 시작했지만 유족들의 오열이 터지면서 침묵은 깨졌다. 이들의 어깨도 들썩이고 몇몇 병사들은 눈가를 훔쳤다.

고 차유철 상병의 어머니 최영애(49) 씨는 “여기 있는 너희들은 모두 우리 아들들이다”며 울부짖었고 다른 유족들도 병사들의 어깨를 껴안아 가며 흐느꼈다.

고 박의원 상병의 어머니 장정애(54) 씨가 박 상병의 영정을 가슴에 안고 “아들아, 네 아버지(사수)가 왔다”며 영정을 유재현 병장에게 건네주자 유 병장은 “의원아 내가 왔다, 나야 나다”며 두 차례 크게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

부대원들은 3분여간의 조문 뒤 육군중앙수사단이 수사결과를 발표한 기자회견장으로 이동했다. 이들은 수사발표 후 보도진 및 유족들과의 일문일답을 통해 자신들이 생각하는 사건 경위와 의혹들에 대해 거리낌 없고 또렷이 답했으나 간간이 목이 메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들이었다.

‘수류탄 투척 후 몇 분이 흐른 후 총기난사가 있었다’는 군 수사발표에 대해 유 병장은 “수류탄이 터진 뒤 수초 후에 곧바로 총기난사가 이어졌다”며 “우리 부대원 모두 그렇게 진술했다”고 밝혀 여전히 의문을 남겼다.

특히 부대원들은 “김동민 일병의 개인문제로 인해 발생한 끔찍한 사고가 왜 불화나 선임병들의 구타 등 비인권적인 문제로 초점이 맞춰지는지 알 수 없다”며 강한 불만을 표출했다.

지상록 일병은 “우리 부대는 어느 부대보다 선후배 간 분위기가 좋고 정말 화목했다”며 “김 일병은 부대전입 때부터 제대로 적응을 하지 못해 선임병들이 질책도 하고 다독거리기도 했지만 군 생활에 적응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김 일병의 중학교 동창인 천원범 일병도 “군 생활은 누구나 힘든 것이지만 김 일병은 선임병들을 무시하고 욕하고 대든 경우도 있었다. 만일 부대 내에 숨겨진 문제가 있었다면 내가 책임을 질 수 있다”며 울먹였다.

김선영 군목은 “김 일병을 보면 왠지 어둡고 힘들어 보였는데 제대로 다독거리지 못해 아쉽다”며 “그러나 부대원들은 모두 훌륭한 병사들인 만큼 밖에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이들을 욕하지 말라”고 말해 주위를 숙연케 했다.

유가족들도 “군복무에 최선을 다하다 전사한 우리 자식들이 마치 폭력을 행사해 이런 참극이 빚어진 것처럼 더 이상 매도하지 말라”며 “살아남은 우리 자식 같은 부대원들 역시 괴롭히지 말고 따듯한 눈길로 대해 달라”고 말했다.

성남=남경현 기자 bibulus@donga.com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

▼김일병 신병규육대서 "고참이 괴롭히면 자살할 것 같다"▼

경기 연천군 최전방 감시소초(GP)에서의 총기난사 사건을 조사 중인 육군중앙수사단은 평소 선임병에게 불만을 가진 김동민 일병이 미리 계획한 뒤 사건을 저지른 것으로 재확인됐다고 23일 밝혔다.

또 김 일병의 심리상태를 진단한 결과 정신 병력은 전혀 없었다고 수사단은 덧붙였다.

윤종성(대령) 수사단장은 이날 경기 성남시 국군수도병원에서 현장 재검증 결과와 생존병사 및 김 일병의 추가 진술을 토대로 이 같은 내용의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수사본부에 따르면 김 일병은 중학교 동창인 천원범 일병에게 지난달 11일부터 “수류탄을 까고 총을 쏴 부대원을 모두 죽이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 사고 이틀 전인 17일 저녁까지 5차례에 걸쳐 같은 말을 반복했다.

김 일병은 사고 당일인 19일 오전 2시 35분경 수류탄 1발을 던진 뒤 선임병의 K-1 소총을 이용해 침상 쪽으로 총을 난사해 2, 3분 사이에 범행을 저질렀다.

윤 단장은 “생존병사 25명 중 22명이 ‘수류탄 소리를 총성보다 먼저 들었다’고 진술했다”며 “김 일병은 범행 직전 약 15분 동안 내무반에서 고민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김 일병은 신병교육대에서 작성한 자기 소개란에 ‘입대 전 온라인 게임을 즐겼고, 고참이 괴롭히면 자살할 것 같다’고 적었으며, GP 근무 중 작성한 수양록에도 군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내용이 있다.

국가인권위원회 한희원(韓禧源) 인권침해조사국장은 “김 일병이 소속된 연대에서 관리하는 자살 우려 병사 8명 중 김 일병은 포함되지 않았다”면서 “부대의 병사 관리체계에 허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

▼생존 부대원들까지 회견…의록일부 해소▼

군 당국이 23일 발표한 최종 수사 결과로 경기 연천군 최전방 감시소초(GP) 총기난사 사건을 둘러싼 각종 의혹은 상당 부분 풀렸다는 평가다.

특히 취재진과 유족들의 질문에 생존 부대원들까지 나와 충실히 답변함으로써 여러 억측을 해소하고 발표의 신뢰도를 높일 수 있었다는 것.

먼저 박의원 상병이 수류탄에 몸을 던져 폭발 피해를 최소화했다는 일부 유족의 주장에 대해 군 수사팀은 증거가 없다고 해명했다.

군 수사 관계자는 “박 상병으로 인해 인명 피해가 크게 줄어든 것은 확실하지만 현재로선 김동민 일병이 던진 수류탄이 출입문 쪽 침상에서 누워 자던 박 상병의 복부 부위에 떨어져 터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희생자 대부분이 상병이었던 이유도 풀렸다.

사건 초기 선임병인 상병들이 조건반사적으로 사태 수습을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난사된 총탄을 집중적으로 맞아 피해가 컸다는 것. 특히 차유철 상병은 내무반 불을 켜기 위해 스위치가 있는 출입문 쪽으로 달려가다 입구에서 김 일병의 집중 사격을 받았다.

윤상호 기자 ysh100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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