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책사업 표류]섣부른 공약… 정부 또 어정쩡

  • 입력 2005년 2월 4일 18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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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고속철도 천성산 터널 공사 문제는 정부와 지율 스님 측이 3개월간의 환경조사에 합의해 최악의 사태를 비켜 갔다. 그러나 정책의 일관성이 허물어졌다는 점에서 씁쓸한 선례를 남겼다.

▽또 밀린 정부=이해찬(李海瓚) 국무총리는 4일 열린우리당 워크숍에 참석해 “지율 스님의 정책적 판단이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면서 “그러나 정부가 국민 목숨 하나하나를 소중히 하면서 국책사업을 차질 없이 추진해 나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이 총리는 “공기(工期)인 2008년까지 40개월 정도 남았으므로 공사가 다시 진행돼 10%의 공기만 앞당기면 예정된 기간에 마칠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면서 “정부는 최대한 공기나 사업비가 늘어나지 않는 방향으로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곰곰이 따져 보면 정부가 원인 제공을 한 측면이 적지 않다. 2002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당시 노무현(盧武鉉) 후보는 천성산 터널공사 백지화를 포함한 노선 전면 재검토를 공약했다.

지율 스님 등이 ‘노선 백지화와 대통령 공약 이행’을 요구하며 정부를 잡고 놓아주지 않은 것도 그 때문. 이후 공약으로 발목이 잡힌 노 대통령의 노선재검토위원회 구성 지시와 공사 중단→공사 재개→지율 스님 단식에 따른 공사 중단→법정 공방→공사 재개 등의 파행을 겪었다.

청와대는 100일 동안 계속된 지율 스님의 이번 단식 농성 때는 한발 뒤로 물러선 채 총리실에 ‘악역’을 맡기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2003년 초 천성산 터널 공사 문제가 쟁점화됐을 때에는 노 대통령이 직접 공사 중단과 재협상을 지시했고, 문재인(文在寅)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이 직접 지율 스님과 만나 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청와대가 사회갈등 현안에 일일이 개입하면서 모든 책임의 화살이 노 대통령에게 날아오자 지난해 하반기부터는 총리실과 각 부처로 하여금 갈등 현안 조정에 나서도록 했다.

▽정부의 속내=정부로서는 “다른 국책사업도 이번처럼 단식 등으로 저지하면 물러설 것이냐”는 지적이 가장 뼈아픈 대목이다.

국무총리실 남영주(南永柱) 민정수석비서관은 “만약 지율 스님에게 불상사가 생긴다면 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겠느냐”고 고충을 토로했다.

정부는 일단 환경공동조사에 적극 협조한다는 방침이다. 조사단이 발파 중단을 요구하면 수용할 수 있다는 것. 남 수석비서관은 “조사단이 완벽하게 합의한다면 공사 중단 결정이 나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속내는 다르다. 정부 측 전문가와 환경단체 추천 전문가가 동수여서 100% 합의가 이뤄지긴 쉽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깔려 있다. 이 경우 정부는 대법원의 판단에 맡긴다는 생각이다. 지율 스님 측이 낸 공사중단 가처분 신청이 대법원에 계류 중이기 때문이다.

남 수석비서관은 “합의가 안 되면 대법원으로 갈 수밖에 없다”며 “대법원 판결에 승복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강조했다.


정용관 기자 yongari@donga.com

김정훈 기자 jnghn@donga.com

▼천성산은 어떤 곳▼

4일 오후 2시. 울산 울주군 삼동면 경부고속철 13-3공구 천성산 원효터널 공사 현장은 발파 작업 소리와 함께 중장비들의 움직임이 분주했다. 공사 현장은 부산 방향으로 볼 때 원효터널(13.23km) 입구와 삼동터널(235m) 출구가 150m 거리를 두고 마주보고 있으며 양측의 공사가 동시에 진행 중이다. 원효터널 입구는 천성산의 산자락이 시작되는 곳.

원효터널은 현재 200m가량 굴착이 진행됐으며 삼동터널은 100m 정도 뚫린 상태이다. 공사 관계자는 “200m를 굴착한 결과 지질 상태가 나쁘지 않아 지하수 누출은 없었다”고 말했다.

천성산은 경남 양산시 하북면과 울산 울주군에 걸쳐 있다. 해발 700m를 넘는 봉우리들이 9개의 능선을 따라 꼬리를 물고 이어져 있어 ‘영남의 금강산’이라 부를 정도로 경관이 수려하다.

현재 내원사를 비롯해 홍룡사 노전암 10여 개의 암자가 있다.

천성산은 산 정상 부근에 펼쳐진 20여만 평 규모의 고산평원 화엄벌과 원시 상태의 자연을 볼 수 있는 무제치 밀밭 화엄 대성 학골늪 등 20여 개의 습지가 형성돼 있다.

1997년부터 발견되기 시작한 이들 늪 중 일부는 1998년 습지보전지구로 지정돼 관리인이 배치됐고 일반인의 접근이 차단되고 있다. 원효터널은 이들 늪에서 수평으로 200∼1000m, 수직으로 200∼500m 정도 떨어져 있다. 그러나 무제치늪의 경우 사람들의 출입과 배수공사 임도 건설 등으로 인해 파괴가 진행돼 늪이 건조화되고 급속히 초원지대로 변화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율 스님과 환경단체는 원효터널이 지하수맥을 잘못 건드릴 경우 늪지대의 물이 모두 빠져나가 습지가 파괴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한국철도시설공단 측은 터널과 늪은 지하 직선거리로 수백m 이상 떨어져 있으며 주의해서 공사를 하면 늪지대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천성산 주변은 이미 파괴될 대로 파괴됐기 때문에 터널 굴착을 반대할 이유가 없다는 목 소리도 있다.

울주군 삼동면의 한 주민은 “이미 일부 늪지까지 임도가 개설돼 있고 산중턱까지 아파트가 건설된 곳도 있다”며 “환경단체는 왜 그때는 심하게 반대하지 않다가 환경 파괴도 적을 것으로 보이는 터널 공사는 반대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부산=석동빈 기자 mobid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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