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임채청 칼럼]“진보도 아닌 것이…”

  • 입력 2004년 10월 12일 18시 57분


한 일본 언론인의 칼럼집을 읽다가 머리를 쳤다. 일영사전을 찾아보니 회귀(回歸)와 혁명(革命)의 영어 표기가 동일하더라는 대목에서였다. 한영사전에도 그의 말처럼 ‘회귀’라는 항목의 첫머리에 ‘revolution’이라고 나와 있다.

회귀의 사전적 의미는 본디 있던 자리로 돌아간다는 것. 기존질서를 뿌리째 뒤흔드는 혁명의 속성이 회귀라면 기막힌 역설이다. 그래서 모두가 미래를 걱정하는데, 진보를 표방하는 집권세력만 유독 과거에 매달리는 것일까?

▼혁명도 아닌 것이…▼

현 집권세력이 혁명을 꿈꾸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들이 공공연히 거론하고 있는 ‘주류(主流) 교체’는 혁명의 서술적 표현에 불과하다. 1년8개월 가까이 거칠게 밀어붙인 일련의 개혁프로그램도 이 한마디로 압축될 수 있다.

그들이 집착하는 과거사 청산이 대표적 사례다. 하지만 영욕(榮辱)이 함께 얽혀 있는 ‘역사의 연속성’을 인정하지 않는 과거 단절은 회귀가 아니다. 특정 시대의 일반적 정서, 즉 ‘역사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 과거 부정도 회귀가 아니다.

또한 ‘돌아가야 할 자리’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전제되지 않은 과거사 청산은 결코 혁명이 될 수 없다. 성공할 수도 없다. 거기에 불순한 책략이 숨어 있다면 오히려 훗날 역사오염 또는 역사 왜곡이라는 비판을 면할 길이 없을 것이다.

국가적 역량을 결집해 부단히 나아가도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계속 뒷걸음질만 치는 집권세력에 대한 여론은 싸늘해진 지 오래다. 무리한 과거사 청산 시도를 둘러싼 갈등과 대립의 심화가 전반적인 개혁의 공신력을 급속히 약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국회까지 장악한 여권이 집권 2년도 안돼 이처럼 기력이 쇠한 전례는 없다. 그들이 자꾸 뒤만 바라보자 진보에 대한 지지층의 환상과 열기도 빠르게 가시고 있다. 항간에 벌써 차기(次期)를 얘기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게 그 적신호다.

여권 인사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반대세력의 저항’은 국정실패의 주요인이 아니다. 그보다는 진보를 외치면서도 과거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앞으로 뭘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는 그들 내부의 모순과 방향성 상실이 근본 요인이라고 해야 옳다.

“나는 진보도 아닌 것이 만날 욕만 먹는다.” 노무현 대통령이 11일 베트남에서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의 말을 굳이 기자들에게 전한 것에서도 정체성 혼란에 대한 심각한 인식을 감지할 수 있다. 노 대통령의 전언엔 물론 자신의 심경이 담겨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여권이 진보적 이미지를 탈피할 가능성은 거의 없을 듯싶다. 그들 스스로 그렇게 하려고 노력할 것 같지도 않다. 여러 가지 여건을 살펴볼 때 당분간은 반대로 진보색채를 한층 뚜렷이 하면서 개혁의 속도를 올릴 가능성이 크다.

우선 조만간 원내 과반의석이 무너질지 모른다는 꽤 현실성 있는 우려가 그들을 더욱 한쪽으로 내몰고 있다. 이번 국정감사 과정에서 그들이 보여준, 거여(巨與)답지 않은 과민반응과 과잉대응이 그러한 초조감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현존하는 사회적 부조리의 원인을 으레 과거정권의 잘못에서 찾는 개혁주도세력의 타성을 그들이 벗어버리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어느 정권보다 도덕성을 내세우는 그들인 만큼 명분이 마땅치 않은 진로 선회는 주저할 것이기 때문이다.

▼방향 잘못 잡은 개혁의 위선▼

이미 여권은 연내에 주요 개혁작업의 기본 틀을 마련하기 위해 서두르고 있는 모습이다. 혹 잘못된 것이 있거나 그럴 위험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정치적 명분 때문에 추진을 강행하고 있지 않나 걱정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개혁에 대한 위선이자 국민과 국가를 기만하는 것이다. 판단착오가 있거나 그럴 위험이 있다면 솔직히 인정하는 게 개혁의 대의에 맞다. 일단 멈추고 재검토한 뒤 재추진하거나 포기하거나 돌아가는 게 책임 있는 자세다.

임채청 편집국 부국장 ccl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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