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與 친일규명법 개정안]선택조사 불가피…‘편파’ 불씨

  • 입력 2004년 9월 12일 18시 41분


“시민단체의 추계대로 조사대상자를 10만명쯤으로 잡더라도 제한된 시간에 그 많은 사람들의 60년 전, 100년 전 행위를 정밀하게 밝혀 내 권위 있게 판정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결국 궁예식 ‘관심법(觀心法)’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를 가려내야 할지 모른다.”

열린우리당이 국회에 상정한 친일진상규명법(약칭) 개정안을 훑어본 한 중견 변호사의 말이다. 대상자가 너무 많고 대상 행위가 너무 오래된 일이라 진상규명위원회의 한정된 인력으로 조사하고 판정할 수 있는 물리적 한계를 크게 벗어났다는 지적이다. 그는 “선택적 조사가 불가피할 텐데, 그럴 경우 또 다른 편파 왜곡 논란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덧붙였다.

○‘고무줄’ 같은 조사대상자 수

여당 일각에서는 경찰의 경시(총경) 등 일정 직위 이상을 기준으로 하면 대상을 3000명쯤으로 압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한나라당은 여당 개정안대로 ‘일제에 협력한 행위가 현저한 자’까지 포함하면 최소 3만1000명은 넘을 것으로 본다. 경찰관리 1만2000명, 일본군 입소자 1만7664명, 보통문관시험 합격자 1488명, 고등문관시험 합격자 411명, 판검사 임용자 221명 등이 조사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개정안이 규정한 ‘문화 예술 언론 학술 교육 종교 등 각 분야와 지역단위에서의 친일행위자’는 계산하지 않은 수치다. 실제로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시민연대’ 관계자는 7월 국회 설명회에서 “개정안의 21개 친일반민족행위 범주에 들어가는 대상자는 어림잡아도 10만명”이라고 말했다. 학계 일각에서는 그 이상이라는 추산도 나오고 있다.

○진상규명위원은 9명뿐인데…

진상규명위원회는 위원장 1명과 상임위원 2명을 포함해 9명의 위원으로 구성된다.

개정안의 활동기간은 5년. 조사대상자가 최소 3000명이라 하더라도 위원 1명이 330명 이상을 맡아야 한다. 그리고 조사대상자가 10만명이라면 위원 1명이 1만1000명 이상을 맡아야 한다.

친일반민족행위 조사나 판정도 사실 확인 및 판단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점에서 범죄 수사나 재판과 비슷하므로 이 같은 부담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무리라는 것을 금세 알 수 있다. 심의위원, 자문위원, 사무처 직원의 도움을 받는다 해도 마찬가지다.

사실 친일진상규명은 조사대상자의 명예나 유족 및 자손의 명예감정을 치명적으로 훼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수사나 재판 못지않은 엄격한 절차가 요구된다.

○의문사규명과 비교해 보면…

유사한 일을 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경우를 살펴보면 비현실성이 더욱 확연하게 드러난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도 9명인데 3년 동안 다룬 사건이 85건에 불과했다. 그나마 그중 24건은 ‘진상규명 불능’으로 결론을 내렸다. 나머지 61건 중에도 의문사를 인정한 것은 30건뿐이다.

또한 의문사진상규명위의 조사대상은 1969년 3선 개헌 이후 민주화운동과 관련해 공권력의 위법한 행사로 의문사에 대한 의혹이 있는 사건에 국한됐다. 길어야 30여 년 전의 일이어서 살아있는 관련자나 생생한 증거자료가 많은데도 실적이 그 정도였다면 친일진상규명은 얼마나 지난(至難)한 작업일지 짐작할 수 있다.

○훨씬 큰 조직인 법원과 檢·警도…

법원의 재판은 일반 형사사건의 경우에도 기소 이후 대법원 판결까지 1년 이상이 걸린다. 사안이 복잡하면 4, 5년씩 걸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기소 이전의 수사단계에서 소요되는 기간도 만만치 않다. 법원 인력만 수천 명이고, 검찰과 경찰의 인력은 수만 명에 이르는데도 그렇다.

최고법원인 대법원만 본다면 1년에 처리하는 사건이 보통 2만5000건. 그러나 대법원은 법률심으로 증거 채택과 법률 적용의 적정성 여부만 판단하므로 이들 사건은 모두 1, 2심을 거쳐 사실 관계가 거의 확정된 것이다. 그런데도 13명의 대법관과 48명의 재판연구관들은 이들 사건에 파묻혀 산다.

○부실조사 위험과 불공정 논란

검찰의 한 관계자는 “절도처럼 단순한 사건도 수사기관과 법원이 조사 또는 심리해야 하는 증인과 참고인 수가 2명이고, 골치 아픈 사건은 10명을 넘기도 한다”고 말했다. 즉, 친일진상규명 역시 조사대상자뿐만 아니라 관련 증인과 참고인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므로 조사 부담이 정치권 예상의 몇 배에 이를 것이라는 의미다. 그는 또 “법률적 소양이 부족한 비전문가들이 의욕만 갖고 오래된 일을 파헤치려 할 경우 예상외의 혼란을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대법원의 한 판사 역시 “소수의 진상규명위원이 몇 세대 전에 있었던 수천 건 또는 수만 건의 사건에 대한 조사부터 판정까지 제대로 마무리하는 것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어렵다”고 단언했다.

결국 여당 개정안대로 친일진상규명 작업이 진행된다면 한쪽에선 ‘수박겉핥기’ 시비가, 다른 한쪽에선 ‘정치보복’ 논란이 끊이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일제강점기 경찰관리 직급별 인원
연도경찰부장(현 경무관)경시(현 총경)경부(현 경정)경부보(현 경감)순사(순경)합계
1919조선인01011340

6,935

7,098
일본인13343045567,3878,294
1925조선인011951707,0577,333
일본인13733361110,13111,113
광복 직전조선인12110522010,27210,619
일본인124843379014,77516,058
출처:①서울특별시사 편찬위원회, 서울 600년사 제4권(1919년과 1925년 통계)②수도관구 경찰청, 광복이후 수도경찰발달사(광복 직전 통계)

박성원기자 swpark@donga.com

조수진기자 jin06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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