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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8월 17일 18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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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에서는 후세인 정권에 협력한 바트당원들을 전후 재건에 데려다 쓰는 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뜨겁다. 1957년 이라크 바트당에 들어간 후세인은 1968년 바트당이 주도한 쿠데타에 참여해 혁명평의회 부의장을 맡았고 79년 대권을 물려받았다. 후세인 집권기간 바트당원들은 국가통치기구의 골간을 이뤘다.
후세인 체제에서 바트당원들의 압제를 받으며 반(反)체제 활동을 하다가 미군의 개입으로 집권세력이 된 사람들은 바트당원들을 심정적으로 용인하기 어렵다. 이라크 과도통치위원회 위원이었던 아마드 찰라비는 “구(舊)바트당원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것은 세계 2차대전 직후 독일 정부가 나치를 참여시키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바트당이 35년 동안 집권한 이라크에서 바트당원들의 기술, 지식, 경험을 완벽하게 배제하고서 나라를 재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과도통치위원회는 먼저 교사들을 포함해 수천명의 하급관리들을 복귀시킬 수밖에 없었다. 후세인 집권세력의 텃밭이었던 수니 삼각지대에서 끊이지 않는 테러공격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도 바트당원들에 대한 유화정책이 절실한 실정이다. 그들을 모든 공직에서 내쫓고 탄압하고 차별한다면 결국 이들은 총과 수류탄을 들고 새 집권세력에 저항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을 찾지 못할 것이다.
스페인, 남아프리카공화국, 아르헨티나, 칠레 등 독재에서 민주화로 이행한 나라들을 보면 독재정치를 주도한 세력에 대한 심판과 소극적 협력자들에 대한 포용을 병행했다. 나라를 세우고 재건하는 과정은 다양한 세력을 끌어안고 배려하는 정치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2차대전 후 미국은 나치 전범들에 대한 뉘른베르크 재판이 끝나기 전에 관료사회, 산업계, 군부를 주도했던 나치를 완전히 축출하고서는 독일을 재건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치의 소극적 협조자들은 사면받고 독일 재건에 참여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나라를 세우고 공산화를 막는 과정에서 친일세력을 기용했다. 일제의 헌병 오장(伍長)을 하다가 광복 후 지리산 공비 토벌대장을 한 신기남 열린우리당 의장의 부친도 그러한 사례다. 이에 비해 항일무장투쟁을 했던 북한의 김일성은 철저하게 친일세력을 숙청했다. 이 대통령이 국가 정통성을 훼손했다는 비난을 받기는 했지만 김일성 정권을 피해 남으로 내려온 사람들을 활용하고 외세(미군)를 끌어들여 공산화를 막았기 때문에 남쪽에서라도 자유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들을 법정에 세우며 역사 바로 세우기를 하겠다고 나섰지만 5·6공 세력과 손잡고 정권을 획득했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제2의 건국’을 주창하면서도 지지세력의 한계 때문에 역사에 손댈 생각을 못했다.
나홀로 집권에 성공한 노무현 대통령은 거칠 것 없이 일제와 독재시대의 유산을 정리하겠다고 선언했다. 친일 진상도 규명하고 유신잔당과 5·6공 세력도 배제하고 ‘뒤집혀진 역사인식’을 바로잡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긴 역사에서 5년 집권기간은 어찌 보면 단막극에 불과하다. 스스로의 역사를 만들기에도 빠듯한 시간이다. 그리고 세계 역사는 다양한 세력을 포용해 국가를 위해 힘을 합치도록 이끈 지도자가 성공한 사례를 집대성해 보여주고 있다.
황호택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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