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기각]“국민상처 치유할 큰 리더십 보여달라”

  • 입력 2004년 5월 14일 18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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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헌법재판소가 국회의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기각하면서 63일간의 ‘탄핵정국’은 끝났다. 하지만 탄핵 찬반을 둘러싼 이념 및 세대간 갈등과 국론 분열은 우리 사회에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다. 이에 본보는 원로 지도자인 강영훈(姜英勳) 전 국무총리와 현명관(玄明官)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의 긴급 좌담을 마련해 탄핵정국 이후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짚어봤다.》

▽강영훈 전 총리=우선 헌법재판소의 탄핵안 기각 결정의 의미부터 살펴 봅시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국회 탄핵안 통과는 어떤 의미로든 우리나라 헌정사의 불상사로 기록될 것입니다.

우선 탄핵을 주도한 야당에게 몇 가지 묻고 싶습니다. 지난해 노 대통령이 이른바 ‘10분의 1’ 발언을 했을 때 한나라당에서는 노 대통령 선거 캠프의 불법자금이 자신들의 10분의1을 넘는다는 점을 입증하는 데 주력할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불법 정치 자금 근절에 함께 나가자’고 주장했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여권이 상생의 토대를 제공하지 못했지만 야당도 상생을 할 자세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현명관 전경련 부회장= 탄핵안을 둘러싸고 큰 사회적 혼란도 있었지만 우리나라의 법치주의가 더욱 확고히 정착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헌재가 탄핵안을 기각하면서도 노 대통령의 몇 가지 위법 행위에 대해 분명히 지적함으로써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법을 위반하면 이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른다는 교훈을 후대에 물려줄 수 있게 됐습니다. 예전 같으면 대통령이 선거법 위반 등의 사안으로 탄핵을 당하는 일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강=다른 측면에서 볼 때 이번 헌재의 판결에는 더 이상 정치권이 정쟁(政爭)을 하지 말고 타협과 조화를 이루는 정치를 해달라는 바람이 반영돼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이번 탄핵은 순수한 의미의 탄핵소추가 아닌 정쟁수단으로서의 탄핵소추라는 의미가 처음부터 내포돼 있었습니다. 탄핵소추가 순수하지 못하다는 점을 국민들이 비난했고 이같은 점이 반영돼 탄핵은 기각됐다고 봅니다. 이번 기각은 탄핵을 정쟁으로 악용해서는 안된다는 선례를 남겼습니다. 국민들도 63일 동안 헌재의 결정을 기다리며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여, 한국의 정치발전에 획을 그은 긍정적인 부분도 있습니다.

▽강=노 대통령으로서도 현행 법이 잘못됐다면 공론화 과정을 거쳐 새 법을 만드는 적극적인 리더십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현 정권은 개혁과 혁신을 줄기차게 주장하면서도 근본적인 변화에는 아직 별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여기에다 노 대통령도 앞으로는 국가 최고 지도자로서 언행에 유의했으면 합니다.

▽현=여하튼 이번 탄핵사태를 겪으면서 세대간 이념간 대립과 갈등 현상이 뚜렷이 나타났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심지어 언론에서조차 방송과 신문이 대립하는 부작용까지 나타났는데 이같은 국론분열과 갈등을 어떻게 치유할지에 대해서도 말씀을 들려주시지요.

▽강=국론분열과 갈등의 치유는 누구보다도 노무현 대통령에게 달려 있다고 봅니다. 노 대통령은 이것 아니면 저거라는 식의 이분법 논리보다는 대화와 타협, 그리고 조화를 이루는 방향으로 국정을 운영해야 합니다. 결국 갈등과 분열의 치유는 노 대통령의 리더십에 달려있습니다.

▽현= 상생의 정치의 핵심은 대통령에게 있다고 봅니다. 노 대통령이 리더십을 발휘해 통합을 이뤄내기 위해선 무엇보다 ‘내식구 감싸기’를 끝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통령은 내 지지기반이 어떤 계층이라는 인식을 빨리 잊어야 합니다. 문자 그대로 상생의 정치는 내 지지층이 아니라 나를 지지하지 않은 층을 의도적으로 포용할 때 가능합니다. 대통령이 포용의 정치 리더십을 발휘할 때 우리 사회의 갈등은 치유될 것입니다.

▽강=한 마디 보태면 대통령의 제대로 된 현실인식도 갈등 치유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국민경제를 발전시키고 안보를 굳건히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통령과 여당은 경제 발전과 안보를 지키는데 주변 국가는 필요 없고 북한과의 관계개선으로만 모든 것을 다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민족주의적 감정만 내세워 우리끼리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됐다고 봅니다.

▽현=탄핵 심판 이후 정부 여당이 해야 할 일로는 경제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가장 시급하다는 생각입니다. 여권은 현 경제 상황이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가장 어렵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권 일각에서는 “상황이 어렵지만 위기까지는 아니다”고 인식하고 있는 듯 합니다. 진심으로 안타깝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경제 분야에 어떤 실적을 남기고 어떤 역할을 했느냐가 결정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노 대통령은 이제부터라도 경제에 모든 것을 ‘올인’(All-In)하는 대통령이 돼야 합니다. 위기 국면인 만큼 노 대통령이 직접 진두 지휘해야하고 그래서 일단 위기에서 탈출한 뒤 성장과 분배를 놓고 토론을 해야합니다. 비유컨대 현재 우리나라 경제 상황은 체력이 약해 개혁이라는 수술조차 받을 수 없는 환자라고 봐야합니다.

일단 이 환자가 수술을 받을 수 있을 만큼 체력을 키우는 게 급선무지요. 좋은 환경을 만드는 게 우선 순위이고 그래야 실업이 없어지고 일자리를 만들 수 있습니다. 정부 여당이 추경 예산을 편성하겠다는 것은 근본 대책이 아니며 고통을 잠시 잊게 하는 캠퍼주사에 지나지 않다는 판단입니다.

▽강=일각에서는 현 정권이 자유보다는 평등을 지나치게 우선시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경제의 근간이 되고 있는 기업 관련 정책의 경우 극단적인 평등만을 추구하면 절대 안됩니다. 평등지상주의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켜줄 리더십이 절실히 요구됩니다.

▽현=개혁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개혁은 하나의 수단이고 그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습니다. 결국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일단 경제 살리기가 개혁의 목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다시 말씀 드리지만 이번 탄핵은 정치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듯이 한국 경제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습니다. 외국인들은 한국을 흔히 다이나믹한 나라라고 합니다. 변화의 속도가 빠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여기에는 부정적 의미도 있습니다. 뒤집어 보면 예측이 불가능한 나라라는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탄핵소추가 일어났습니다. 기업들은 탄핵이 되면 어떻게 되나 정부의 정책방향은 어디로 갈까 촉각을 곤두세웠지만 예측은 불가능했습니다. 결국 불확실성의 증대로 경제주체들이 일시적인 활동을 중단했습니다. 한국 경제와 정국에 대한 이미지도 나빠졌습니다. 대통령은 물론 정부나 여야 모두 정치의 불안정과 예측불가능성으로 경제가 대내외적으로 나쁜 영향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최근 출자총액제한제도 등을 놓고 여권 내 이견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현 경제 상황은 위기이고 다수의 개혁안이 미뤄지는 한이 있더라도 우선은 경제 살리기에 최우선을 두어야 합니다. 특히 정부의 기업에 대한 각종 규제 해제 문제가 최우선적으로 다루어져야 합니다.

▽강=우리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정치권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정치권은 이제 흑백 논리를 극복하고 현실을 중시하는 실용주의 노선을 견지해야 합니다. 즉 각종 현안을 민주적인 절차를 해결하는 것이 생활 습관화되어야 합니다. 정치권도 국회를 토론의 장으로 만드는 근본적인 노력을 경주해야합니다.

▽현=16대 국회까지는 국민들이 정치에 식상했다고 봅니다. 정치권이 국민들의 스트레스와 갈증을 풀어주는 대신 이를 오히려 더 증폭시켜 놓았습니다. 여야 모두 자기 혁신을 하지 않으면 정치에 대한 염증이 커지고 나중에는 정치인 입지가 위축되거나 소멸될 수도 있다는 위기 의식을 느꼈으면 합니다. 이벤트나 일과성 제스처로는 민심을 돌릴 수 없는 만큼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정책으로 승부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랍니다.

▽강=정치권이 국내 정치에만 매몰되지 말고 세계로 눈을 떴으면 좋겠습니다. 국내 사정을 갖고는 세계화 시대를 살아갈 지혜가 나오지 않습니다.

▽강=최근 각종 여론조사에서 미국보다 중국을 선호하다는 반응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각종 사안에 대해 반미 구호를 앞세운 집회 등이 빈번해지면서 미국에 대해 그 실체에 대한 정확한 분석없이 이미지로만 판단하는 느낌이 있습니다. 대륙과 대양 국가 사이에 놓인 우리나라의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하는 글로벌한 사고와 시각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현=5년, 10년 후 정세가 어떻게 변화될 것인지, 특히 동북아 세력 재편이 어떻게 이뤄질지 냉철히 봐야합니다. 지금도 분명한 것은 해양 세력과 대륙 세력 간 다툼인 데, 일본 중국 모두 한반도의 통일보다는 현재 상황을 유지하는 것을 선호한다는 일각의 지적에 동의합니다. 각종 특수성을 감안할 때 우리나라가 자주국방만으로 극복할 수 없는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모든 상황을 감안할 때 미국의 역할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는 판단입니다. 독자 노선도 중요하지만 생존을 위한 유연성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며 정부가 이같은 현실인식 바탕에서 외교정책을 수행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리=이승헌기자 ddr@donga.com

박민혁기자 mh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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