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5억 北전달과정 미스터리]어설픈 돈세탁…허둥지둥 송금

  • 입력 2003년 2월 5일 19시 08분



현대상선의 2억달러 대북송금은 뜻밖에도 아주 허술하게 이뤄졌던 것으로 밝혀졌다.

일반적으로 기업이 비자금을 조성할 때는 복잡한 돈세탁 과정을 거친다. 거액을 찾아 작은 단위의 수표로 쪼개 현금으로 찾고 다시 입금하는 절차를 수없이 밟기 때문에 검찰의 계좌추적은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현대상선은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기 전까지 북한의 해외비밀계좌에 입금해야 한다는 급박한 상황에 내몰린 탓인지 돈세탁할 시간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국가정보원이 달러화 송금과정을 도와준 것으로 알려져 정부 차원에서 조직적인 개입이 있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현대상선, 돈세탁 못했다=현대그룹 고위관계자는 “당초 계획은 2000년 6월 7일 산업은행에서 4000억원을 인출한 후 6월 9일 대북송금을 완료하는 것이었다”며 “이틀 만에 2억달러를 세탁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별도 절차 없이 그냥 북한에 보냈다”고 말했다.

감사원 관계자도 “현대상선이 4000억원을 100억원짜리 자기앞수표로 쪼갠 것을 보면 상황이 급박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전형적인 돈세탁 방법과는 거리가 멀고 허술하기 때문에 시간에 쫓겨 제대로 돈세탁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산업은행 자기앞수표 7장을 다른 은행의 수표 65장으로 한번 쪼갠 후 곧바로 26장(2235억원)을 외환은행에 입금시켜 북한계좌로 송금한 것을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현대상선은 정부와의 협의 하에 대북송금이 이뤄지는 것이니 안심하고 돈세탁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외환은행이 이 수표를 국정원의 가공인물로 추정되는 6명의 이서를 받으면서 실명확인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은 금융실명제법에 위반된다.

한편 북한의 비밀계좌가 있는 은행은 송금 다음날(6월 10일)이 토요일 휴무여서 입금확인을 못하고 12일(월요일)에야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는 북한이 남북정상회담 일정을 갑자기 하루 연기한 것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송금창구, 왜 외환은행인가=외환은행은 국내 은행 가운데 외국은행과의 연결망이 가장 좋다. 전 세계 곳곳에 외환은행 계좌가 있기 때문에 무역거래를 하는 기업이라면 외환은행을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이런 이점 때문에 기업의 무역대금 결제와 정부의 대외차관 송금업무를 많이 담당해 왔다.

금융권 고위관계자는 “외환은행은 오래전부터 국정원의 해외송금 업무를 담당해 왔고 지금도 그렇다”며 “국정원의 해외활동자금은 주로 외환은행을 통해 나간다”고 전했다.

또 현대상선을 비롯한 주요 현대계열사의 주거래은행도 외환은행이다. 따라서 수수료수입이 짭짤한 해외송금 및 환전은 대부분 외환은행에서 이뤄진다.

현대아산이 금강산 관광대금을 북한에 보낼 때도 외환은행을 통해 마카오 중국은행(Bank of China) 지점에 개설된 북한계좌로 보낸다.

그러나 무역대금을 해외로 송금할 때는 수입출신고필증과 신용장(LC) 등 증빙서류가 필요하기 때문에 국정원은 유령회사 명의로 관련서류를 위조했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외환은행은 “당시 김경림(金璟林) 행장은 국정원의 환전요청을 받거나 승인한 사실이 없다”며 개입사실을 부인했다.

김두영기자 nirvana1@donga.com

신치영기자 higgledy@donga.com

▼現代 30년 대북사업권 확보▼

5일 금강산 육로관광 사전 답사를 위해 강원 고성군에 마련된 남측 임시 출입국관리시설(CIQ)에 도착한 현대아산 정몽헌 회장(오른쪽)과 김윤규 사장이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있다. -고성=전영한기자

정몽헌(鄭夢憲) 현대아산이사회 회장은 현대상선 대출금 대북(對北)송금에 대해선 “잘 모르겠다. 모르는 일”이라며 즉답을 회피하거나 말을 아꼈다.

정 회장은 5일 금강산 육로관광 사전답사에 앞서 들른 경기 하남시 창우리 고 정주영 명예회장 묘소에서 기자들과 만나 ‘2억달러가 대북 사업 독점계약 대가냐’고 묻는 질문에 “생각해본 적 없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대북사업은 현대만의 독점사업이 아닌 국가적인 사업이며 한반도의 평화와 긴장완화를 위해 꼭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추진해 왔다”며 “2000년 북측의 사회간접자본과 기간산업시설에 대한 30년간의 사업권을 확보한 것은 사실”이라고 밝혔다.

정 회장은 “남북 사이에 많은 교류와 협력이 이뤄지고 있지만 (금강산이나 개성공단사업 같은) 대북사업은 우리(현대)가 아니면 나서는 데가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현대전자의 2억달러 북한 송금설에 대해서도 정 회장은 “모르는 일”이라고 말했으며, 대북 송금을 지시했거나 알고 있었느냐는 질문에도 “잘 모르겠다”며 즉답을 피했다. 다만 “감사원에 대출금 명세를 제출하기 전 보고를 받은 적은 있다”고 해명했다.

정 회장은 이밖에 2001년 5월 갑작스럽게 물러난 뒤 신병 치료차 미국에 머물고 있는 김충식(金忠植) 전 현대상선 사장에 대해선 “섭섭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해 갈등설을 일부 시인했다.

정 회장 등 100여명의 금강산 육로관광 사전답사팀은 이날 오후 강원 고성군 통일전망대 남측 출입국 관리시설(CIQ)에서 금강산 관광버스를 타고 군사분계선을 통과했으며 6일 오후 돌아온다.

이강운기자 kwoon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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