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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9월 8일 18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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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터차관 발언 의미▼
존 볼턴 미 국무부 국제안보 및 군축담당 차관은 지난달 29일 서울에서 “이란, 이라크와 함께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것은 수사학이 아니라 사실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발언을 전후해서 남북한은 경의선과 동해선 연결 등 굵직굵직한 현안에 합의했고 북한의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가졌으며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방북이 결정됐다.
이 같은 분위기에서 그의 발언은 마치 한반도의 평화스러운 파티에 불청객이 끼어들어 불협화음을 내는 것처럼 비친 게 사실. 워싱턴포스트는 지난달 30일 “그의 발언은 한반도정세와 관련해 외교적으로 미묘한 시기에 제기돼 관심을 끌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가 북한에 대한 경계심을 늦춘 적은 없었다. 3월에는 부시 대통령이 북한의 핵동결 준수에 대한 인증을 거부했고 지난달 7일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원자력발전소 콘크리트 기반공사 착공식을 전후해 북한에 핵사찰 수용을 압박하고 있다.
다만 미국은 지금 이라크에 집중하고 있는 단계. 미국은 지난해 10월 발표한 4개년 국방전략재검토(QDR)에서 그동안 두 개의 전쟁을 동시에 수행해 승리한다는 이른바 ‘윈윈(win-win)전략’에서 한 개의 전쟁을 수행하면서 다른 지역에서는 현상을 유지하는 ‘원플러스(one-plus)전략’으로 전환했다. 이 전략에 따르면 이라크전에 전 외교력과 국방력을 집중하고 있는 미 군사전략의 우선순위에서 한반도는 대 테러전의 후방지역이다.
이처럼 미국의 관심이 중동에 가 있는 틈을 타 러시아와 일본은 한반도에서의 급속한 영향력 확대를 꾀하고 있다.
▼러시아 '이삭줍기'외교▼
러시아의 ‘이삭줍기’ 외교가 눈부시다. 미국이 대 테러전을 ‘악의 축’ 국가로 확대하자 러시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악의 축’ 3국인 이라크 이란 북한과의 교류를 확대해 톡톡히 반사이익을 보고 있다.
러시아는 지난달 17일 “이라크와 400억달러 규모의 5개년 경제협력 협정 체결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고 7월에는 이란과 50억달러 규모의 원자로 5기 건설 지원 등을 포함한 10개년 협력 협정을 체결했다.
북한과는 시베리아횡단철도(TSR) 연결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TSR는 한국, 나아가 한일(韓日) 해저터널을 통해 일본까지 연결돼야 경제효과가 극대화될 수 있기 때문에 러시아는 누구보다도 이번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방북을 환영하는 입장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지난달 23일 북-러 정상회담에서 TSR와 한반도종단철도인 TKR 연결의 전제로 북한 철도를 현대화하기 위한 22억5000만달러의 국제 컨소시엄 구성을 제의했다.
▼일-러 한반도문제 공조▼
일본은 러시아와 함께 한반도문제의 직접적 논의구조에서 배제돼 왔다. 특히 중국이 남북한과 동시 수교한 이후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도 북한과 수교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고 있다.
고이즈미 총리는 이번 방북을 통해 수교 가능성을 타진하는 한편 미국과 중국 그리고 남북한으로 돼 있는 4자회담을 러시아와 일본이 포함되는 6자 구도로 바꾸는 방안을 모색한다고 일본 언론들은 보도했다.
일본 역시 경제적으로도 한국의 서해안보다는 동해안 개발을 바라고 있는 입장. 일본의 태평양 해안보다 상대적으로 낙후한 일본 서부 내륙을 개발하면서 한반도 경제권을 중국에 내주지 않아도 되기 때문. 러시아와 안보적 경제적 이해가 일치한다.
이 때문에 대북 접근에서 러시아와 일본이 공조를 취하고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7월 말 아세안지역안보포럼에서 이고리 이바노프 러시아 외무장관이 가와구치 요리코(川口順子) 일본 외상에게 “일본과 아무런 전제조건 없이 대화할 용의가 있다”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뜻을 전달한 것으로 보도됐다. 그리고 한달 뒤 일본은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 일정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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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택기자 euntack@donga.com
▼동-서해 양안시대 준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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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자체는 매력적 투자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북-일 수교가 되어 100억달러에 육박하는 수교자금이 들어가게 되고 북-일 경제협력이 시베리아 경제개발과 연결되기 시작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2000년 4월 미 의회조사국의 보고서는 대북 지원패키지 규모를 최대 200억달러 정도로 예측했다. 국제금융기구의 공공차관 등을 포함한 이 자금은 향후 10년간 매년 20억달러의 엄청난 자금이 북한에 투자된다는 단순계산으로 이어진다. 이 개발자금들의 수주를 노리는 건 당연하다. 물론 120억달러에 달하는 외채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
더 관심이 가는 것은 노동-자원-자본의 비교우위를 지닌 북한-러시아-일본이란 3각축이 주도하는 동해-시베리아 개발사업이다. 북-일수교 이후에는 러시아 극동지역의 가스전, 유전 개발 사업이 본격화될 것이다. 시베리아로 들어간 자본이 북한의 값싼 노동력을 고용, 공업, 농업 전 분야에서 다양한 사업을 벌이게 될 것이다. 기러기형 발전을 주창하는 일본 자본 입장에서는 기러기 날개를 시베리아로 더 벌린다(?)는 점에서 쾌재를 부를 일이다.
한편 시베리아횡단철도(TSR)가 한반도종단철도(TKR)와 연결되면 그것이 가져올 물류비용 절감효과는 무시할 수 없다. 교통개발연구원에 따르면 부산항에서 핀란드까지 철도를 이용할 때 컨테이너(TEU)당 1210달러에 12.5일이 소요되는 반면 해상 교통은 TEU당 1800달러에 28일이 소요된다. 동북아지역이 세계 물동량의 28% 이상을 차지하기 때문에 동북아 경제주체들에겐 무시할 수 없는 절감효과다.
반면 ‘환발해(環渤海) 경제권’을 주창, 서해안 개발을 강조하는 중국 입장에서는 불쾌한 시나리오다. 중국은 외자유치 문제나 TKR 연결 문제 등에서 러시아와 경쟁하고 있고 특히 동북 3성의 발전을 위해 중국횡단철도(TCR)가 동해로 직접 연결되는 항구의 독자 이용권을 모색해 왔다. 중국은 북한의 신의주특구 계획마저 자신들의 경쟁상대로 보고 개성으로 방향을 변경할 것을 종용할 정도다.
경의선 개발이 중국의 ‘환발해 경제권’ 구상과 맞닿아 있다면, 동해선 논의는 동해-시베리아 개발로 이어진다. 경의선-동해선 논란을 중 러 일 모두 주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심지어 미국마저 시애틀에서 연해주를 잇는 동서통로사업(East-West trade corridor project)을 통해 이 지역의 발전방향을 지켜보고 있을 정도다.
동쪽으로는 자본과 자원이, 서쪽으로는 노동과 시장이 넘치는 지경학적(geo-economical) 우위를 지니게 된 우리로서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칠 이유가 없다. 한반도를 물류와 비즈니스의 허브 국가(hub state)이자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연륙교(land bridge)의 출발지가 되도록 하기 위한 세력 균형의 국제감각이 요구되고 있다.
하지만 북한-시베리아 개발계획들은 장기 프로젝트다. 성과도 오래 걸린다. 한반도에 항존하는 냉전구조는 또 다른 불안요소. 주어진 이익을 누릴 수 있는지는 우리의 위기관리능력에 달려 있다. 동북아 다자간 안보체제 등을 이젠 우리가 주도해야 한다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이다.
동서 양안시대는 저절로 열리는 건 아니다. 국제시장은 냉엄하고 ‘선점의 이익’을 분명히 따지기 때문이다. 한동안 잊혀져 온 동해를 돌아보고 선점의 이익이 어렵다면, ‘후발 이익’이라도 계산해내는 지혜가 돋보이는 때이다.
이정철 삼성경제硏 연구원